[이재구코너]모스, 통신 네크워크 선구자

1840년6월20일 모스전신기 특허

일반입력 :2012/06/23 03:05    수정: 2012/06/24 10:02

이재구 기자

1■아내의 죽음을 몰랐던 화가의 자책감

1825년 미국의 워싱턴. 34살의 젊은 화가 새무얼 모스는 이 도시에서 머물면서 미독립전쟁의 영웅인 프랑스의 라파예트 남작의 모습을 그려달라는 의뢰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 고향과는 무관하게 그림 제작일에만 전념하려던 그는 생각은 포니익스프레스사의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온 메신저가 전해 준 편지로 인해 순식간에 바뀌었다.

“네 아내가 아프구나.”

아버지의 편지에는 아내의 와병 사실이 적혀있었다. 그는 즉시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 보니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까지 마친 후였다.

아내가 죽자 모스는 더 이상 뉴 헤븐에 살고 싶지 않았다.

이듬 해인 1826년 당시 워싱턴에서는 새로운 의회의사당이 건립되고 있었다. 모스는 이 의회의사당 내부의 둥근 지붕 원형홀에 그릴 대형 역사벽화 4점을 의뢰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자신을 발탁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이 입찰에 참여했다.

그는 지레 이 벽화제작자가 자신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벽화주문에 따른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며 머리도 식힐 겸 경치와 도시를 스케치했고 유럽박물관에 전시된 유명한 그림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것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을 지우지 못했다.

화가 새무얼 모스의 머릿 속에서 항상 “어떻게 하면 소식을 빠르게 전달할 수단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2■1832년 대서양 선상에서 배운 통신

“저게 뭘까?”

유럽에 간 그는 몇 킬로미터 간격으로 세워놓은 얼핏 풍차같기도 한 목재 게양대를 보았다. 그것은 클로드 샤페라는 프랑스사람이 만든 세마포어(semaphore)라 불리는 원거리 통신수단인 수기신호체계였다.

이 통신수단은 기수가 길다란 나무깃대를 움직여 자기가 있는 탑에서 다음 탑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깃대의 위치로 문자나 숫자를 표시하는 방식이었다.샤페의 이 신호전달방법은 각 지점망을 이용해서 몇분 간격으로 도시나 마을로부터 프랑스의 수도 파리까지 전갈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신호체계를 이용하기 위해 500개 이상의 신호탑이 세워져야 했다. 그럼에도 이 신호방법은 당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소식을 전하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어떤 방법을 쓰면 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1832년, 프랑스에서 대서양 횡단 여객선 서리(Surrey)호를 타고 귀국하던 새무얼 모스는 유럽에 퍼져있던 수기체계를 생각하면서 더 빨리 통신할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었다.

마침 이 배에는 전자기장에 대한 원리를 발견해낸 영국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의 전자기장 이론을 잘 알고 있던 찰스 T 잭슨박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 구입한 전자석의 성능을 자랑하며 유럽에서 직접 보았던 전기실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자 보세요. 한 회로의 역선이 전선을 타고 다음 회로로 건나가는 순간 전류가 유도됩니다. 이것은 곧 한 회로의 전류가 다른회로에 전류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선상에서 잭슨박사는 그에게 ‘전류는 힘으로 작용하는 동력선을 만들어 낸다’는 마이클 패러데이의 이론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면 전기가 흐르면서 전력선을 통해 장거리로 신호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모스는 항해하는 동안 내내 이 장치에 관한 아이디어와 도표를 그리는데 시간을 쏟아부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모스는 배위에서 생각한 전신기를 설계했으나 통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만드는데는 이르지 못했다. 전선을 통해 뭔가 신호를 보낼 수 있겠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몇 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3■조셉 헨리와 모스의 운명적 만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1838년 봄 모스는 조셉 헨리라는 인물을 만났다. 그는 미국의 패러데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조셉 헨리는 1826년 뉴욕 알바니의 한 학교에 교편을 잡으면서 처음으로 전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영국의 윌리엄 스터전(William Sturgeon)이라는 사람의 실험이었다.

원리는 간단했다. 철 조각 주위에 도선을 감아 코일을 만든 후 전지를 연결했다. 그러면 평범한 쇳조각이 갑자기 살아나 다른 쇳조각들을 끌어 당겼다. 뭉툭하게 생긴 말굽처럼 생긴 자석아래에는 전지가 있었다. 비단과 면을 이용해 절연을 시킨 이 전자석을 끄면 모든 것이 멈추면서 철이 떨어졌다.

1830년 헨리는 324kg이나 되는 무게를 들 어올릴 수 있는 전자석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계속 용량을 늘려 685kg도 넘게 들어올리는 시범까지 보였다. 인근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전자석이 쇠조각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알지 못했다. 19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중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전신기 원형을 발명해 모스에게 알려줌으로써 길이 남게 된다.

조셉 헨리는 전지에서 뻗어 나와 전자석으로 이어지는 도선의 길이를 늘려보았다. 전지를 전자석 바로 옆이 아닌 옆방이나 아래층으로 가져가도 전지를 켜면 철 조각들이 달라붙었다.알파벳의 문자하나를 보낼 때마다 커다란 금속 조각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 전보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주 작은전자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옆에다가 딸각거리는 조그마한 물체를 두었다.

전지를 켜면 선을 타고 가서 전자석을 가동시켰고 자석은 조그마한 물체를 끌어당겨 딸각 하는 소리를 냈다.

그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의 순간이 지나갔다.

“이 소리를 여러 가지 조합으로 구성해 서로 다른 알파벳을 의미하도록 약속을 정하면 쉽게 통신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마련할 수 있겠군.”

알바니 시골학교 선생 헨리의 발명품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는 뉴저지대(후일 프린스턴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하지만 그는 이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지는 않았다.

조셉 헨리는 프린스턴대 구내에서 전보선을 1마일(1.6km)이상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보를 보낼 기기를 실용화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느낀 헨리는 자신이 해결할 만한 실력이 없다고 깨닫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838년 한 중년의 화가가 그곳을 방문해 이 기기를 보게 됐다. 그가 바로 대서양의 배위에서 무선전신기 개발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실패를 거듭하던 모스였다.

조셉 헨리는 자신의 무선전신기기에 관심을 보여준 이 젊은이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했다. 전지와 전자석, 그리고 전선뭉치 등 자신의 기구를 작동시키는 부품과 기기의 작동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스는 그의 조언에 힘입어 전자석을 고정시킬 수 있는 나무틀, 종이띠 두루마리, 그리고 연필을 진동자 끝에 매달아 흔적을 기록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전기회로를 길게, 혹은 짧게 열거나 닫으면서 오늘날 지진파의 흐름같은 같은 신호를 종이에 그려내는 방식이었다.

프린스턴 방문을 마친 모스는 간단히 신호체계에 관한 아이디어를 도출해 특허를 신청했다. 그는 조셉 헨리와 달랐다. 이 기술을 의회에 보여줘 재정지원을 받고 뭔가 일반인들이 쓸 수 있는 통신기기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4■모스에 앞서 전신기를 발명한 선구자들

이럴 수가, 내가 먼저 발명을 시작한 게 아니었던 말인가?“

1838년. 대서양 건너편 영국 쪽으로부터 모스보다 늦게 전신시스템 발명에 들어간 두 명의 영국인 발명가가 최초의 전신시스템을 만들어 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837년 6월 2일. 윌리엄 F.쿡 경과 찰스 휘트스톤이 전 달에 출원한 전신기술에 대한 특허를 받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세계최초의 상업용 전신이었다. 1840년 7월부터 런던앤블랙월 레일웨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실 윌리엄 쿡의 전신기역시 자신의 독창적 창안은 아니었다. 의사출신인 그역시 하이델베르크대학 동료 게오르그 빌헬름 문케가 보여준 실링이란 사람의 발명품을 본뜬 것이었다.

1836년 4월22일 영국으로 돌아온 쿡은 문케가 보여준 전기통신기기에 대한 제안을 논문으로 낼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해 그의 연구에 킹스칼리지의 교수였던 휘트스톤의 조교 커비가 그들의 통신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이들의 전신기는 후일 나온 모스의 전신기와 전혀 달랐다. 알파벳을 쓴 다이아몬드 형태의 외관을 가진 갈색 나무 통으로 되어 있었다. 이 전신기는 5개의 자석 바늘이 전류의 흐름에 따라 알파벳을 가리키는 방식이었다. 발신자가 메시지를 보내면 이를 수신해 메시지로 받아서 문자판에 옮기는 장치였다. 키보드에는 30개의 손가락 키가 있었다.

이들은 세인트 팬크라스 거리에서 클러켄웰 무어거리 사이에 구리선을 설치하고 유선통신을 시도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는 1마일이상의 거리에서는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인에게 소개받은 찰스 휘트스톤은 이보다 간단한 바늘 세 개달린 통신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쿡은 이미 리버풀에서 맨체스터 사이의 철로변 유선통신 설치하는데 약간의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쿡과 휘트스톤은 특허받은 지 얼마 안된 1837년 7월4일에 스티븐슨선에서 최초의 테스트를 실시됐다. 런던시내와 런던북쪽 캠덴타운의 버밍행 레일웨이 사이에 있는 선을 이용해 기차역에 철도 안전신호 신호를 보내는 실험이었다. 두 번째 시험은 7월17일 유스턴 광장과 캠덴타운역 엔진하우스 사이의 4개 임시통신선 사이에서 이뤄졌다.

당시 이를 지켜봤던 영국 귀족 프랜시스 뷰포드 경은 “이것이 이 발명시대의 가장 놀라운 고귀함 중의 하나”라고 이 실험에 대해 극찬했다.

하지만 쿡과 휘트스톤의 이 유선전신 실험결과는 “불필요하게 복잡하며 리버풀과 맨체스터 및 홀리헤드 사이에 선로를 깔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바늘만이 필요한 실용적인 전신기를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쿡과 휘트스톤의 전신기는 모든 영국 전역의 모든 역에서 사용되는 전신기가 됐다.

1840년 7월 첫째주 런던과 블랙월레일웨이 간에 최초로 완전한 세계최초의 상업용 전신이 시작됐다. 그리고 6년 후. 1846년 8월. 이들은 일렉트릭텔레그래프컴퍼니란 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신의 대명사로 전세계적으로 통하는 전신기술의 싹은 미국에서 자라서 커가고 있었다.

5■모스의 오리지널 전신기는 ‘모스부호’를 쓰지 않았다

“내가 만들면 이 전신기를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1837년 9월 2일. 동창을 만나러 모교 프린스턴대에 온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프레드 베일. 그는 이 대학교수인 모스의 전신기기를 보고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모스가 만든 전신기는 전자기장에 의해 만들어진 회로를 열었다 닫으면 진동자가 흔들리면서 종이띠에 연필이 부호를 표시해 주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1937년 9월 초 모스가 처음 만들기 시작한 이른 바 ‘오리지널 모스전신기’, 즉 ‘아메리칸 코드’라 불리는 오리지널 모스코드와 그의 전신기 제작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숫자들, 단어들, 문장에 의한 표시 시스템, 표시시스템들이 표시돼야 한다. 둘째로 타이핑 세트로서, 그안에서 타이핑을 세팅하는 규칙을 가진 신호를규정하고 통신하도록 된 일련의 타이프, 셋째로 포트-룰 이라고 불리는 타이프룰의 순간을 제어하는 기기, 이것은 타이프라는 수단을 통해 전기가 지나가는 순간과 시간을 제어한다. 네 번째로 레지스터가 있는데 이는 이것은 신호를 영원히 기록한다. 다섯 번째로 사전이 필요한데 이것은 번호를 매기거나 이 전신시스템에 적용된다. 여섯 번째로 피해를 막기 위해 전도체를 놓는다.“라고 쓰고 있다.

두 달이 지난 후인 10월24일. 모스는 베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전이 만들어졌다네. 자네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었는지 모를 것일세. 그러나 결국 완성됐고 우리는 숫자로 말하거나 쓸 수 있게 됐네”라며 사전의 완성을 베일에게 알렸다. 모스의 오리지널 전신기는 수신한 알파벳코드를 사전을 가지고 일일이 대조해 해석해야만 했다.

베일은 모스에게 자신이 이 기계를 개선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창 잘나가던 제철소를 운영하던 사업가 아버지로부터 향후 실험에 들어갈 비용 2천달러를 기부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제철소가 있는 스피드웰 공장에서 통신기 성능개선에 전력을 다했다.

솜씨좋은 기계장이인 그는 모스의 원래 통신기기에서 몇가지 중요한 개선점을 발견했다.

이듬 해인 1838년 새무얼 모스가 만든 전신기 원형을 개선해 전송 키와, 기록기(recording register),릴레이 자석 등을 갖춘 성능이 개선된 또다른 방식의 새로운 통신기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진동자를 사용하는 대신 기계의 전환키에 무게를 더했고, 연필 대신 철침 펜(steel point pen)으로 바꿨다. 이는 종이테이프 안으로 모스부호를 들여쓰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전기충격이 오면 구멍을 뚫어 부호를 표시하는 방식인 레지스터구조를 향상시키려는 목적도있었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베일은 모스 전신기에 사용되는 알파벳코드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짧막한 점(․ dot)과 선(- dash)으로 알파벳 철자를 표기할 수 있는 오늘 날과 유사한 모스부호표기 방식이었다. 이는 전신기의 해석속도를 엄청나게 높여주었다.

베일의 전신기는 ‘점과 선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물건(A Simple Matter of Dots and Dash and Dashes)’라는 제목으로 미국 특허청에 출원됐다. 1837년 10월3일의 일이었다. 출원자이름은 새무얼 모스로 돼 있었고 이 후로도 계속해서 모스명의의 특허로 남았다.

6■1839년 베일, 오늘날의 모스부호 실험 성공

이듬 해인 1838년 1월 6일. 베일은 아버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일반인을 상대로 2마일(3.2km)에 걸친 전신선을 가설하기에 이른다. 그가 스피드웰 제철소에서 모스부호를 이용해 송수신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메시지는 “참을성있는 웨이터는 실패자가 아니다.(A patient waiter is no loser)였다. 이후 수개월 동안 모스와 베일은 전신기를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 연구원들과 마틴 밴 뷰런 대통령 앞에서 시연하였다.

1840년 6월20일. 미특허청은 베일이 만든 모스전신기와 부호에 대해 미특허권(1647호)을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 전신기의 효율과 유용성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 당연히 대중화까지는 갈길이 멀었다.

1832년 모스는 미의회를 방문, 정치가들에게 전신기 시범을 보이러 갔다. 이들의 전신기 시연은 프랭클린연구소의 탁월한 발명가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 의회에 장거리 전신실험을 위한 재정을 지원하라고 촉구했다. 이때 모스는 자신의 시연에 깊은 감명을 받은 메인주 출신 하원의장 프랜시스 O J 스미스와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대다수 의원들은 전신기를 쓸 데 없는 장난감 정도로 보아 넘기며 모스를 실망에 빠지게 만든다.

이에 굴하지 않던 모스는 뉴욕에서 보다 큰 규모의 전신기 시연회를 준비했다.

그는 맨해튼과 가버너스 아일랜드 사이의 2마일 길이의 구리선을 놓아 뉴욕항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실험을 준비했지만 시연직전 그곳을 지나던 배가 항해를 막는다며 구리선을 끊어버린 탓에 시연회가 무산되는 아픔까지 겪게 된다.

7■역사적인 전신기시대 서막 열다

“전신선 설치에 필요한 보고서를 잘 써주시면 의원님께 꽤 짭짤한 몫을 챙겨 드리지요.”

1842년. 모스는 메인 주 출신 프랜시스 O.J. 스미스의원을 남몰래 만나 이같이 로비했다.

그는 의회 통상위원회 소속 의원이자 하원의장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이 해 미 의회에서는 워싱턴과 볼티모어시 사이에서 수행될 전신실험을 지원하기 위한 3만달러짜리 재정지원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하지만 법안통과가 지연돼 모스는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1843년 초. 마침내 그가 전신기 자체를 포기할 시기가 온 듯 했다.

미 상원이 마침내 전신사용에 관한 표결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원들이 이 계획에 반대했다. 낙망한 모스는 자신의 꿈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의회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2월 어느 날 아침 특허청장의 딸인 애니 엘즈위스가 아버지의 친구인 모스를 찾아,왔다.

“축하드려요.?”“뭘 축하한다는 거지?”

“법안이 통과됐어요.”

마지막 순간에야 상원에서 법안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들은 모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게 최초의 전신 메시지를 쓰는 영예를 주도록 하지.”

“어머나, 그렇다면 성경에 나온 ‘신이 하신 놀라운 일.(WHAT HAS GOD WROUGHT)’로 해 주세요.”“그렇게 하지.”

1843년 12월 10일. 미의회는 전신시범사업 가능성을 테스트 하는 비용으로 3만달러를 지불하도록 했다.

모스와 그의 부모는 결국 높은 목재전봇대를 세우고 유리를 절연장치로 삼아 구리선을 잇도록 했다.

7■ “하느님이 행하신 일”...모스, 유선전신을 대중에게 보이다

1844년 5월24일. 모스는 드디어 볼티모어에서 워싱턴의 대법원 공관에 이르는 전신장치 설비를 완전히 마쳤다.

애니 엘스워스가 그에게 보낼 메시지를 주었다.

“하느님이 행하신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WHAT HATH GOD WROUGHT)워싱턴에 있는 모스가 전신 키로 이 문장에 해당하는 모스부호 메시지를 두드려 볼티모어로 보냈다.

알프레드 베일은 볼티모어 플랫스트릿역에 설치된 전신기를 통해 워싱턴에서부터 구리전선을 타고 들어와 또렷이 전달된 모스부호 수신 전달음을 들었다.

타,타,타 타~타 타~타~ 타....

수신음이 끝나자 베일은 수신기로 타전돼 들어온 모스의 메시지가 찍힌 종이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는 타전기로 이를 다시 44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워싱턴의 대법원 공관 전신실에 있는 모스에게로 타전해 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워싱턴정가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보내진 메시지가 똑같이 그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전화가 발명되려면 23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던 시점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비로소 멀리 떨어진 두 지점 간에 같은 시간에 똑같은 소식을 공유할 수 있는 기기가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19세기의 첨단 통신기기인 전신은 분당 30글자를 보낼 수 있었다.

8■이 놀라운 발명을 어떻게 퍼뜨릴까?

그러나 모스와 베일에게는 이 발명품을 대중화시켜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있었다. 이 시범이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은 극적 사건의 연속이었다.

“이 메시지를 민주당 전당대회 결정 내용을 메시지로 워싱턴에 전달하면 사람들이 전신의 위력을 알게 될 거야.”

1844년 5월27일. 베일은 최초의 공식 전신 시연 사흘 만에 볼티모어에서 열리던 민주당 전당대회 첫 결정 소식을 워싱턴 D.C.국회의사당의 로투나로 전달했다. 제임스 K. 포크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 후보 지명소식을 기사로 쓰기 위해 워싱턴에 모여든 신문사 기자들은 이미 제임스 포크 지명사실에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고 놀랐다. 이미 그들은 전신을 통해 포크 후보자가 지명된 소식을 알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베일은 볼티모어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결정된 사실들을 타전했다. 워싱턴에 있는 사일러스 라이트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는 내용이었다.

워싱턴에서는 전신실의 모스와 함께 있던 라이트의원이 후보지명 거절 메시지를 볼티모어의 베일을 통해 당 지도부에게 전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라이트와 자신들사이에 전신기가 있어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몇차례 메시지 교환이 이뤄지면서 볼티모어의 당 지도부도 워싱턴D.C에서 보내왔다는 라이트의원의 부통령 후보 거절의사가 진짜란 사실을 이해했다.

미국 전역의 신문들이 전신을 통해 이처럼 신속히 소식이 오간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9■미 전역으로 확산...세계화의 초석놓다

모스부호 방식의 전신 특허를 받은 지 5년째인 1845년. 미국정부가 그의 발명 특허권을 사지 않겠다고 하자 모스는 직접 마그네틱 텔레그래프사(Magnetic Telegraph Company MTC)를 차렸다. 그리고 뉴욕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이어지는 민간전신선로를 건설했다. 이로써 미동부도시들을 연결시킨 최초의 광범위한 통신망이 생겨났다.

게속해서 1851년까지 미국 내에 50개 이상의 전신회사가 생겨났다.물론 대다수의 회사는 모스 특허를 가진 MTC의 소유였다.

미 동부해안에 위치한 신문사들은 사무실에 설치된 전신기를 통해 들어오는 소식들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즉각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됐다. 민간전신회사들은 날씨와 기사 외에 개인들끼리 주고받는 소식도 전달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군인들은 장거리에서도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군사명령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됐다. 민간인들도 우체국을 통해 몇날 몇일 걸렸던 편지를 단 몇분만에 전신으로 보낼 수 있게 됐다.

그 뒤로도 몇십년 동안 발명가들은 메시지를 대량으로, 동시에 주고 받을 수 있는 기술을 잇따라 내놓는다. 토머스 에디슨의 2중선로를 이용한 전신법, 전화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의 4중 송신법 등은 통신의 역사를 더욱더 새롭게 만든다.

나는 내 몫과 기여한 부분에 대해 인정받지 못했다.

10년 이상의 노력 끝에 전류를 이용한 전신의 꿈을 실현한 모스는 마침 내 원거리 통신의 이상과 부라는 영예를 동시에 거머쥔 주인공이 되었다. 반면 실질적으로 그를 도와 현대로 넘어오기까지 사용된 모스부호를 발명한 알프레드 베일은 볼티모어 시연 이후 자신이 받기로 한 모스전신기 몫의 25%가 그 절반으로 깎였다.

1848년 자신의 공적을 실망한 베일은 모스와 결별했다. 캘리포니아 지역 새클라멘토 강에서 엄청난 크기의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베일의 몫은 상당부분 의원시절 모스를 도와준 프랜시스 O.J.스미스 전 의원에게로 넘어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허는 MTC만의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갱신특허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신회사들이 생겨났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1851년 하이럼 시블리라는 사람이 세운 웨스턴 유니언이었다. 하이럼 시블리는 설립 10년 만에 미대륙 최초의 횡단통신선로를 설치했다.

미전역으로 확산일로를 걷던 유선전신의 속도와 편리성은 그동안 미국에서 가장 빠른 우편망으로 꼽히던 포니익스프레스의 필요성을 의심케 만들었고 결국 과거의 유산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모스전보는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마침 철도망이 계속 증설되고 있었기에 철로를 따라 가설된 전보선을 통해 수많은 전보선이 재연결되기 시작했다. 통신산업은 철도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통신선로를 가설하는 기간산업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역시 엄청난 사회기간산업망 구축에 필요한 일자리를 요구했다.

1867년이 되자 미국과 유럽사이에 최초의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이 연결됐다. 전신은 드디어 세계화를 향해 나아갔다. 19세기 중반의 인터넷격인 전신은 급속도로 지구촌을 구리로 된 유선통신 네트워크로 연결해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신은 1876년 전화기 발명이전까지 30여년간 최고의 통신수단이라는 지위를 유지했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았다. 그것은 전기가 보급되기 전까지 지역별로 달랐던 시간이라는 변화가능한 개념을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준 첫 번째 문명의 이기였다.

모스부호를 사용하는 유선전보의 등장은 말그대로 지구가 세계화되는 실마리가 된 최초의 대 사건이었다. 특히 전보는 미국의 발전을 전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가속시켰다.

10■미대륙의 생활 풍속도를 뒤흔들다

“만일 여러분이 내 사무실에서 나와 20분만 앉아 있으면 나는 여러분에게 언제든, 미국내 어느 지역의 사업 현황이든 알려줄 수 있을 겁니다.”

1870년 당시 윌리엄 오튼 웨스턴 유니언 사장은 의회에 나와서 자신감 있게 이같이 말했다.

그는 철로 주변으로 가로등처럼 세워진 전신주와 역사에 설치된 전신소를 통해 들어오는 전보로 그 해 중서부 곡창지대의 수확량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오튼은 오늘 날의 인터넷처럼 미국 전역에 펼쳐진 최대의 비즈니스 신경망을 총괄하는 사령관이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아날로그형 기계식 인터넷 정도에 해당하는 전신시스템에 대한 그의 믿음은 확고 했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대륙의 미국인들에게 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인 전신기술은 마치 축지법과도 같았다.

철도 주변으로 세워진 전신주는 곧 정보포트를 의미했고 이를 통해 나온 정보의 판매나 이용은 곧 돈을 의미했다. 이를 간파한 탐욕적인 사업가 J.P.모건은 중소 철도기업체에 이어 결국 웨스턴유니언을 손아귀에 넣기에 이른다.

아내가 세상을 뜬 줄도 모르고 귀가했다가 원거리 통신방법에 눈을 뜬 34세 청년 새무얼 모스. 1844년 워싱턴과 볼티모어간 통신을 성공시킨 그의 열정은 20년도 채 안돼 이처럼 19세기 후반 미 대륙의 정치,경제,사회 풍속도를 통째로 흔들었다.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우편배달 역마차 포니익스프레스 기반의 기존 통신체제가 빛을 잃었는가 하면 여론조사가 전신을 통해 각 당으로 보내지기도 했고, 경마순위 조작이나 외국의 주식 등 경제관련 소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면서 경제체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배경은 미국 동부에서 태평양까지 영향을 뻗친 전신의 힘이었다.

하지만 이 놀라운 통신수단도 1995년 1월26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웨스턴 유니언의 전신이 송신서비스 중단을 통보하면서 갑자기 멈춰버렸다.

11■155년 간 버텨 온 발명품 '전신'이 막내리다.

‘155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2006년 2월 2일. 이날 전세계 주요 언론은 로이터,AP 등을 통해 타전된 웨스턴유니언의 전신(텔레그래프)서비스 중단 소식을 뒤늦게 보도했다.

언론은 “웨스턴유니언이 155년 된 서비스의 종료사실을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인터넷사이트에 올렸다. 2006년1월27일부터 모든 전보와 상용메시징서비스를 중단한다”는 이 회사 사이트에 나온 공지사항 (http://www.telegramstop.com)를 인용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겨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언론보도 중 유독 눈에 띈 것은 뉴욕에서 발행된 '선(The SUN)'지의 기사였다.

지면 한 쪽에 모스부호를 이용한 전신서비스 방식을 그대로 빌어 ‘마지막 텔레그래프 서비스’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독자들에겐 낯선 방식이었다. 전신 전송방식 그대로 쓴 이 문장은 정말 생소했다.

토요일 콤마(,) 웨스턴유니언은 마지막 전보를 보냈다. 스톱 155 하이픈(-)년 하이픈(-)된 서비스의 종말은 간단한 노트와 함께 웨스턴유니온어파스트로피 에스(의)웹사이트에 올랐다콜론(:)

인용부호(“)2006년콤마(,)1월27일부터 유효콤마(,)

관련기사

웨스턴유니온은 모든 전보와 상용메시징서비스를 중단한다 스톱 종료인용부호(”)

실제로 이 기사가 전신으로 보내졌다면 여기에 사용되는 모든 알파벳은 도트( ․ )와 대시(-)를 이용하는 모스보호(Morse Code)로 전송됐을 것이다. 웨스턴유니언은 자사의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한세기 반 동안 이어져오던 기술과의 결별을 만천하에 고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