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하늘을 나는 그림...TV의 발명㉙뉴욕증시 상장

일반입력 :2013/02/25 00:14    수정: 2014/04/29 18:35

이재구 기자

33■판즈워스텔레비전앤라디오, 뉴욕증시에 상장하다

RCA와 판즈워즈 측 변호사들이 특허소송 타결을 협상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판즈워스는 바빴다.

그는 쿤, 로에브 등 월가 투자자들의 투자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무려 2년간 전자제품 제조사업을 위한 세부계획을 짜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디애나주 포트 웨인시에 있는 공장을 봐 놨네.”

쿤과 로에브가 한때 자동 주크박스업체로 명성을 날리다 파산한 케이프하트컴퍼니의 공장건물을 찾아내면서 판즈워스텔레비전 제조공장 설립계획도 틀을 잡아갔다.

주크박스 제조업체 케이프하트는 가장 비싼 주크박스의 레코드판 교체 메커니즘에 이상이 생겨 자꾸 판을 깨뜨리자 결국 결국 파산한 회사였다.

판즈워스의 새로운 TV제조회사에 가세한 사람 가운데 많은 이들이 RCA에서 이적해 왔다. RCA로 봐선 배신자들이었다. 하지만 데이비드 사노프가 있는 절대 RCA 사장이 될 수 없었던 E. A. 니콜라스부사장은 과감히 이 회사 사장을 맡기로 했다.

1938~1939년 휴가를 위해 동북부 애팔래치아로 낚시 여행을 갔을 때 그는 불현 듯 지난 10년간 연구와 소송으로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서 뭔가 다른 것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조지, 농장을 사고 싶습니다. 그 값에 해당하는 제 주식을 팔아주세요.”

파일로와 펨은 메인주 브라운스빌에 있는 조지 에버슨의 쓰러져 가는 농장에 들렀다가 이곳을 인수키로 맘먹었다. 그리고는 샌프란시스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에게 투자한 월가 사람들은 판즈워스 부부에게 이 계약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300만달러에 상당하는 필의 주식을 케이프하트공장시설 구입을 위해 현금화하고 이 회사를 뉴욕증시에 상장(IPO)시키라는 것이었다.

1939년 3월 31일. 그는 드디어 에버슨의 농장을 인수했다. 모든 문서계약서에 사인이 이뤄졌을 때 조지에버슨은 300만달러의 수표를 건넸고 판즈워스텔레비전라디오사(Farnsworth Television and Radio Corporation)가 사업을 시작했다.

이 시기의 세계 정세는 수상했다. 2주전인 3월 중순 히틀러는 체코를 침공해 프라하를 손에 넣었다. 히틀러는 체코 공화국을 독일제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슬로바키아를 독립국가로 승인했다.

이러는 동안 세계 텔레비전 역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대중들은 임박한 텔레비전시대의 도래를 열렬히 기대하고 있었다.

사노프는 뉴욕 세계박람회를 미국 상업용방송의 시대를 여는 기념비적 장소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1896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히트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1939년 4월 30일 데이비드 사노프 RCA회장은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TV로 중계된 루즈벨트대통령의 개막식에 이어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소리는 물론 보는 것까지 가능하게 됐습니다.(Now we add sight to sound.)

이 연설이 있었던 주 말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제한된 숫자로나마 뉴욕의 일부 백화점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이 최초의 상업용 방송용 TV는 美라디오제조자협회(Radio Manufacturers Association·RMA)가 제안한 441주사선에 초당 30프레임을 사용하는 브라운관TV였다.

1936년 11월 29일자 워싱턴포스트지가 343주사선 TV보다 선명도를 30% 높이려 노력하고 있다고 전한 뉴스는 사실이었다.

다른 업체들도 잇따라 시장 경쟁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FCC가 공식적인 방송신호표준 발표를 지연하고 있었음에도 RCA의 시장참여 움직임을 뒤따르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FCC가 텔레비전을 시험용으로만 사용토록 인가해 준 것조차도 무시했다. RCA는 광고를 팔 수 있는 상업용 방송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방송을 하고 있지 않은가.

포춘은 세계박람회개막에 앞서 쓴 기사에서 이 TV방송을 '사노프의 1천300만달러짜리 뉴미디어'라고 표현했다.

RCA는 미국에서 TV방송시대를 열었지만 여전히 판즈워스와 특허협상을 타결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판즈워스의 발명특허기술에 밀려 지난 1919년 이래 RCA가 누려온 라디오시장의 지배력을 판즈워스의 TV에 그대로 내 줄 판이었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이제 자체적으로 판즈워스특허없이는 전자 동영상, 즉 TV동영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했다.

1939년 말까지 판즈워스가 확보한 특허기술은 100개가 넘었다. 여기에는 전자식 주사선, 동기화,전자석을 이용한 동영상초점 맞추기,톱니파 등을 망라한 공중으로 동영상을 전송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술이 망라됐다.

하지만 RCA는 이처럼 TV를 만들고 대외적으로 NBC방송을 통해 방송까지하면서도 판즈워스에게는 단한푼의 로열티를 내지 않고 버텼다. 엄연한 불법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판즈워스 측에 로열티 지불 방식을 엄청나게 줄여 수십만달러를 한꺼번에 내겠다고 제안했다.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판즈워스측 변호사의 거부로 협상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편 뉴욕박람회가 개막된 1939년 4월 30일 이후 얼마 안돼 판즈워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인디애나주의 포트웨인시 공장으로 이사해 판즈워스텔레비전앤라디오사의 연구담당이사로서 부사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판즈워스는 곧 단순한 회사 임원직이 따분해지면서 싫증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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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뭔가 새로운 것을 개발해 봐야겠어.

그의 천성과 수학적, 연구적 재능은 애초부터 단순히 제품 양산을 책임지는 공장 제품담당 엔지니어직과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