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하늘을 나는 그림, TV ㉞인류에 남긴 선물

일반입력 :2013/03/02 00:01    수정: 2013/04/15 13:59

이재구 기자

38■ “이게 모든 걸 가치있게 만들었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낭비하게 하는 괴물을 만들었어.”

판즈워스는 자신의 발명품인 TV에 대해 아들 켄트 판즈워스에게 이렇게 자책하곤 했다.

켄트는 어린 시절 내내 내 TV는 쓸 데가 전혀 없어, 우리집에서 TV는 안돼. 네 지적 다이어트에 TV가 없었으면 좋겠구나”하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당시 TV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안 좋았다.

이 기기는 가르치고 보여주고, 그리고 감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그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상자속에 든 선과 빛일 뿐이다.

RCA의 임원 에드워드 머로우는 1958년 업계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 발언으로 사노프의 분노를 사 임원직에서 해임된다.

자신의 회사에 있는 즈보리킨이 판즈워스보다 앞서 TV를 먼저 발명했고 특허출원했다며 10년 가까운 소송으로 그를 괴롭히던 데이비드 사노프 RCA회장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TV를 발명하지도 않은 그는 RCA를 세계 TV시장의 거인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1956년 흑백TV와도 호환방송이 되는 컬러TV를 내놓아 호환성없는 컬러TV를 만든 CBS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사노프는 컬러TV가격을 내려 대중에 보급한 지 4년 만에 RCA에 흑자를 안기며 흑백에 이어 컬러TV시장에서도 단연 선두주자가 됐다. 그러자 이듬 해인 1961년엔 경쟁사 제니스의 사장이 창피를 무릅쓰고 RCA로부터 5만개의 브라운관을 주문하는 일까지 생겼다.

RCA는 CBS,필코, 제니스 등 7개 TV제조 경쟁사들을 아우르면서 세계 TV제왕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RCA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이제막 RCA의 특허를 라이선스받아 성장하기 시작한 일본의 마쓰시타,소니 등은 미국전자시장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사노프 RCA회장의 실행력과 직관력은 RCA와 자회사 NBC를 세계 방송사에 우뚝 서게 만들었다.

판드워스가 자신이 출연한 CBS흑백TV 방송 ‘나에겐 비밀이 있어요’에서 “어떤 때는 가장 쓰라리다”고 말한 배경에는 이처럼 잘 나가는 RCA의 상황도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1969년 일어난 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1957년 자신의 고등학교 1학년 때 착상한 TV발명에 대해 발이래로 가진 자신의 지난 세월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것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1945년 원자탄 폭발, 1963년 케네디대통령 암살,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사건보다도 더 큰 충격이었다.

1969년 인류 최초의 달착륙 순간이었다. 인류에게 이보다 극적으로 TV의 위력을 보여준 혁명적 순간도 없었다.

1969년 7월20일 점심이 지난 시간.(20:18 UTC).판즈워스는 아내 엠마 펨과 함께 고향인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서 역사적인 아폴로 11호 달착륙 중계장면을 보고 있었다. 달에서 날아온 전파가 만든 화면은 희뿌옇게 잔상이 생겼지만 분명히 암스트롱 선장이 달위에 발을 내디딛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중계하던 명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도 잠시 말을 잃을 정도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판즈워스에게 이 순간은 또다른 의미에서 각별했다. 그건 전세계가 자신이 만든 TV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무도 이 순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날 밤 판즈워스가 만든 기기는 전세계 인류를 경이로움 속으로 몰고간 도구였다. 이 순간 전세계는 그가 만든 기계를 통해 하나가 됐다.

판즈워스가 고등학교 1학년때 꿈꿨던 ‘하늘을 나는 그림’을 실현한 기기 TV는 인류역사 이래 꿈으로만 여겨졌던 모습을 38만4천km 우주에서부터 날아와 지구인들에게 생생히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꿈의 발명품을 통해 신화와 전설속에만 존재했던 달의 모습을 인류에게 실시간으로 선물해 주었다.

1971년 3월12일자 뉴욕타임스 부고는 그를 “내성적이고,마른데다 조용하고 잘난 체 하지 않는 남자였으며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나이였다. 31세때 그는 권위있는 평가자들로부터 살아있는 10대 수학자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다”고 썼다.

이 해 12월 12일 RCA의 제왕 데이비드 사노프가 눈을 감았다. 누구보다도 방송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라디오에 이어 TV까지 정복한 사나이는 TV의 아버지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돌파력, 그리고 산업의 앞날을 내다보는데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데이비드 사노프 사후 RCA는 서서히 빛을 잃고 쇠락해 가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사노프가 죽기 1년 전 RCA제국을 승계한 아들 로버트 사노프는 아버지만큼 강력한 수완을 보여주지 못했다.

1960년 컴퓨터공룡 IBM에 대항해 참여한 컴퓨터 산업의 부진, 거대기업의 저주로 불리는 문어발식 사업다각화의 실패, 그리고 후발 TV 제조업체의 거센 추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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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의 마쓰시타,소니, 샤프, 히타치,미쯔비시, 그리고 네덜란드 필립스의 추격은 무서웠다. 사노프 사후 1990년대말까지 약 30년 간 세계 전자업계의 최강자리는 RCA에서 일본 업체들에게로 넘어갔다. 미국의 전자산업 시대는 갔다. TV,VCR,반도체를 두루 섭렵한 일본 전자업체들은 황금기를 구가했다.

미국의 전자거인 RCA를 제친 후 무려 30년 이상 세계를 뒤흔든 일본의 절대적 지배를 깬 것은 한국의 전자업체들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힘을 기르기 시작해 90년대 중반 이후 파워를 과시하기 시작한 삼성전자,LG전자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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