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하늘을 나는 그림...TV ㉚골리앗의 눈물

일반입력 :2013/02/26 00:01    수정: 2013/02/27 08:08

이재구 기자

34■골리앗 RCA의 항복, 그리고 눈물

이런 가운데 RCA측에서도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판즈워스와의 특허소송 협상을 이렇게 질질 끌 수만은 없어.

데이비드 RCA회장은 뉴욕세계박람회가 끝난 지 한달도 채 안돼 이렇게 다짐했다.

'1934년 아이코노스코프가 판즈워스의 이미지 디섹터보다 앞섰다고 주장했다가 온천하의 조롱거리가 됐고, 전년도인 1938년에는 이미지 오디콘특허 소송을 냈다가 이미 판즈워스가 특허받은 기술로 밝혀져 또다시 망신을 당했지 않은가.'

이미 데이비드 사노프가 있는 한 RCA에서 사장이 되길 글렀다고 생각한 닉 니콜라스부사장이 판즈워스 텔레비전앤라디오로 이적해 사장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RCA제국의 총수는 드디어 판즈워스에게 로열티를 지불해 소송건을 마무리짓기로 마음먹었다.

매듭을 전제로 한 특허소송 타결협상도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 또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939년 9월. 마천루가 즐비한 뉴욕 록펠러센터 플라자 30번지. RCA본사건물. 자회사 NBC방송국이 함께 입주해 있는 이 빌딩에서 두 무리의 사람들이 만나고 있었다. 그들은 RCA와 판즈워스텔레비전 간에 그토록 오랫동안 줄다리기 해 오던 특허소송건을 타결짓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RCA는 판즈워스텔레비전앤라디오에 100만달러를 일시불로 지불하고, 텔레비전수상기가 팔릴 때마다 해당하는 러닝 로열티를 지불한다. 10년 가까이 이어져 오던 미래 산업의 황금어장을 둘러싼 특허소송을 끝내는 협약서의 문장은 이렇게 요약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날 모인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TV특허를 두고 싸운 주인공들은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컨퍼런스룸에서는 데이비스 사노프회장이나 블라디미르 즈보리킨, 그리고 파일로 판즈워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신 양측의 변호사들과 임원이 나타나 이 역사적인 협정에 사인을 했다.

오토 샤이러 RCA 특허담당 부사장이 RCA역사상 최초로 로열티를 타사에 지불하는 협상 계약서에 사인하려고 앉았다. RCA부사장 출신의 닉 니콜라스 판즈워스텔레비전앤라디오 사장이 사인을 했다.

판즈워스의 오랜 변호사인 도널드 립핀코트 변호사가 이를 확인했다.

샤이러 부사장은 문서에 사인을 하면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는 시골뜨기 발명가였던 판즈워스가 정부 지원으로 세워진 거대 라디오제국의 제왕 데이비드 사노프를 굴복시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무소불위의 라디오 트러스트를 통해 특허를 독점해 오던 라디오오제국의 제왕RCA와 판즈워스가 제국을 나눠갖게 된다는 의미였다.

이제 텔레비전산업에 진입하려는 기업은 RCA,그리고 판즈워스의 특허를 함께 라이선스 받아야만 했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1940년 4월 미 상원에서의 청문회에서 녹음된 증언을 통해 판즈워스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제 TV시장에서 두 회사는 사실상 2인3각 경기를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RCA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그누구보다도 더 텔레비전의 발명에 기여한 사람은 판즈워스씨입니다. 나는 전자업계가 TV에 진출하려면 RCA는 물론 판즈워스씨의 라이선스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41년 4월. FCC는 제조업체별로 논란이 되던 방송 표준 규격을 확정 발표했다. 이제 판즈워스가 기대하던 TV대중화시대가 열리는 문제만 남아있었다. 라디오제조업체협회(RMA)가 선임한 도널드 글렌 핑크는 업체들간의 이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525주사선으로 TV규격을 최종 확정했다.

이제 TV시장을 둘러싼 모든 주변 상황은 판즈워스의 기대대로 가는 듯 했다. 하지만 FCC TV규격발표 7개월만인 12월7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은 TV확산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중 라디오나 TV 등 대다수 민수용 전자제품 생산중단명령을 내렸다. 민수용 제품생산 공장은 군용 레이더나 통신기기 등을 생산하는 라인으로 전환됐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이들 공장은 TV수상기를 만드는 공장으로 되돌려졌다. 사람들은 임박한 TV시대의 도래를 열렬히 기대하고 있었다. 전쟁은 판즈워스에겐 또다른 시련을 안겼다. 사람들은 판즈워스가 20년전 만든 TV에 열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제 막 그결실을 따려는 그에게 전쟁은 대공황보다도 더 큰 악재가 생겨난 셈이었다. 이제막 시작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은 그가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특허기간을 갉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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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꿈을 미처 실현하기도 전에 이런 특허 소멸시효에 신경쓰면서 판즈워스의 정신은 피폐해져만 갔다.

그는 짐을 싸서 메인주로 옮겼고 이후 2차대전 내내 연구를 하며 칩거에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