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대에 등장한 기억확장기 미멕스(MeMex: MeMory Extender)
“사람의 마음은 연상작용에 의해 작동한다. 한 항목을 파악하면 그 다음 항목이 마음의 연상에 의해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 작용은 뇌세포가 이루고 있는 복잡한 그물모양의 궤적에 따라 일어난다...수많은 정보를 찾는데 있어서 있어 사람의 연상능력을 본떠서 정보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면 어떨까?”
1945년 6월 말. 미국 과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버니버 부시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을 위해 뉴멕시코 사막으로 떠나기 전 날. 그의 글이 실린 잡지 ‘월간 대서양’이 서점과 가판대에 깔리기 시작했다.
부시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법으로 급증하는 정보량에 대비하고 싶어했다. 그는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 같은 개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가올 정보과잉시대에 대비한 기계개발 아이디어를 제시한 이 글은 이미 6년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As We May Think)'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부시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의 기계를 ‘기억을 확장해 주는 기계(MeMory Extender)’, 줄여서 ‘미멕스(MeMEx)’로 부르기로 했다.
미멕스는 종이자료를 20분의 1로 줄여 보관할 수 있는 마이크로필름 저장장치, 건판사진, 그리고 방대한 인덱스로 표시된 지식의 저장창고를 만들어 몇 개의 키보드만 치면 어떤 지식의 부분이라도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아날로그 컴퓨팅의 꿈을 표현하고 있었다.
부시의 글은 사람들의 엄청난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연상 접근 방식은 비록 아이디어에 그쳤지만 오늘날 인터넷에서 파란줄로 쓰여진 단어를 클릭하면 해당파일로 연결되는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하는 웹 정보검색의 효시였다.
■웹프로그램 인콰이어(ENQUIRE)를 개발하다
1980년 영국 옥스퍼드를 졸업한 한 젊은이가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와 6개월간의 프로그래밍 계약을 체결한다. 팀 버너스리라는 이름의 이 청년에게 맡겨진 일은 방대한 자료를 관리하는 시스템 개발이었다.
CERN은 2차대전이 끝난 후인 1953년 9월 유럽의 20개국가가 미국의 과학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만든 합동연구소였다. 그런 만큼 연구소는 언제나 수십개의 나라에서 온 수천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북적거렸다.
전세계 모든 곳에서 온 컴퓨터가 사용되고 있었고 과학자들은 방대한 연구성과를 쏟아내고 있었다.
세상사람들이 아직 ‘정보의 바다’라는 말을 접하기도 전에 이들은 그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팀은 후일 월드와이드웹으로 발전하게 될 간단한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업무 시간 외에 틈틈이 프로그래밍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인콰이어(ENQUIRE) 프로그램. 팀 버너스리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잡학사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Enquire Within UponEvery thing)’에서 따 온 이 프로그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인콰이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누군가가 그 데이터에 접속하기만 내가 하려는 일을 보여주며, 내가 여기에 접속해 다른 사람이 연구소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계약을 마치고 CERN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84년. 그는 예전에 만든 인콰이어를 발전시키면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자료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세계에 분산된 하이퍼텍스트를 연계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1989년 팀버너스리는 상사 마이크 센달에게 월드와이드웹을 만들 보고서를 올렸다. 하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한번 해보게.”
마이크 센달 팀장은 팀이 뜻을 굽히지 않자 그에게 당시로는 최첨단인 애플의 넥스트컴퓨터를 한대 사서 건네주었다.
■월드와이드웹을 소개하다.
1990년 팀은 마우스로 클릭하는 것만으로 하이퍼텍스트 문서를 편집할 수 있는 SW를 완성했다.
그리고 1년 만에 하이퍼텍스트를 클릭해 전세계 인터넷콘텐츠를 연결해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검색시스템을 만들었다.
“WWW프로젝트는 정보검색기술과 하이퍼텍스트를 결합해 쉽고 강력한 글로벌 정보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훨씬더 학술적인 정보가 자유롭게 누구에게나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정보가 국제적으로 퍼져있는 팀들 안에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지원그룹에 의해 정보가 전파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991년 8월 6일 오전. CERN연구원인 팀 버너스리 박사는 alt.hypertextgroup 란 이름의 뉴스그룹에 보낸 글에서 이같이 쓰면서 새로운 기술시대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자신이 세계최초로 발명한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라 불렀다.
이제 인터넷 사용자들은 컴퓨터를 인터넷에 접속하면 보통 파란색으로 표시되고 밑줄이 쳐져 있는 꼬리표, 즉, ‘하이퍼텍스트(Hypertext)'를 만나게 됐다. 또 인터넷에서 웹주소인 URL(Uniform Document Idenfier)‘을 통해 인터넷상의 어떤 자료나 웹페이지도 서로 연결할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만든 것은 하이퍼텍스트문서들을 주고받기 위한 '주파수를 맞출‘ 규약, 즉 HTTP(Hyper Text Transfer Protocol)였다.
그는 자신의 WWW개발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알고 있었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이것은 멀티미디어로의 확장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애플리케이션 표준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웹에서 이를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팀은 자신이 개발한 하이퍼텍스트와 프로그램의 편리함을 소개하면서 회원들에게 시험해 볼 것을 권한 것이었다.
■누구나 자유로이 웹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팀 버너스리의 웹이 소개된 1991년. 인터넷에서는 또다른 웹 '고퍼(Gopher)'가 한창 인기였다. 하이퍼텍스트기능만 없을 뿐 그밖에는 고퍼가 웹보다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웹서버가 넥스트컴퓨터 전용이었던 반면 고퍼는 다양한 컴퓨터에서 가동됐기에 더욱 인기였다.
팀과 그의 동료는 사람들이 웹을 받아들이도록 자신들이 개발한 SW를 모두 공개했고 웹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듬해 결정적 계기가 왔다. 스물한살짜리 일리노이대 학생이 웹을 마음껏 검색할 수 있는 브라우저를 개발했다. 일리노이대 국립슈퍼컴퓨팅센터(NSCA)에서 시급 6달러85센트를 받고 일하던 마크 안드리센이란 학생이었다. 브라우저이름은 모자이크였다. 웹은 더욱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웹이 갑자기 인기를 끌면서 불확실한 웹 저작권 요구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이 높아졌다. 사람들은 팀 버너스리가 갑자기 저작권을 요구할까 봐 걱정했다. 해커 출신의 빌 게이츠조차도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1993년 봄 고퍼를 개발한 미네소타 대학에서는 일부 고퍼사용자에게 라이선스 비용을 물렸다. 이는 상승 가도였던 고퍼의 인기를 하룻밤 새 떨어뜨리고 말았다.
누구나 자유로이 웹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며 CERN에 어떤 비용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1993년 4월30일 CERN이사들은 이같은 회의 결과를 문서로 공표했다. 누구나 걱정없이 하이퍼텍스트기반의 웹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듬 해 3월 모자이크브라우저를 개발한 마크 안드리센은 후일 넷스케이프로 이름이 바뀌는 모자이크커뮤이케이션스라는 회사를 차렸다.
넷스케이프는 곧 인터넷시대의 정보의 바다의 뱃길을 안내해주는 항해자(내비게이터)가 되어 전세계 PC에 깔렸다.
그는 일반인들을 위한 브라우저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를 만들고는 95년 이를 상장해 억만장자의 대열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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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타임지는 팀 버너스리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100대 인물에 선정했다.
어릴 때부터 거미와 놀기를 좋아했고 영국에서 세계최초로 상용화된 페란티컴퓨터를 개발한 기술자를 아버지로 둔 이 비범한 과학자는 인류의 소통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