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찌가 먼저 개발하면 안된다
“저는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연구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으며 ,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이외에도 라이프치히 물리학연구소에까지 실험이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1939년 8월2일 저유명한 아인슈타인-질러드 편지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해진 후 우라늄위원회까지 결성됐지만 진전이 없었고, 아인슈타인은 다시한번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썼다.
미국의 과학계와 군은 우라늄위원회를 결성한 이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찌독일이 먼저 핵을 개발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끔찍한 가정에 대한 우려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우라늄을 이용해 벌이는 핵폭탄실험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42년 봄 베를린 우라늄공장에서 가져온 원료로 핵폭탄실험에 큰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루즈벨트대통령 직속의 과학기술개발청(OSRD)총책임자인 버니버 부시박사는 고민에 빠졌다. “막대한 자원이 필요한 핵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단기적으로 성과를낼 수 있는 다른 무기개발 프로젝트가 밀릴지도 모른다” 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슈퍼폭탄’으로 알려진 핵폭탄을 먼저 만드는 것역시 치명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가 루즈벨트대통령에게 “미국은 전력을 다해서 핵폭탄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 20억달러라는 거금을 받아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 30군데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핵폭탄연구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 주축의 로스 알라모스 팀은 43년 4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 팀에 44년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 45년 2월초까지 워싱턴주의 원자로에서 나오는 플루토늄 연료들이 보내졌다.
이들은 일본군에서 이 가공할 무기를 사용하기 이전에 이를 실험해 볼 필요가 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핵폭탄의 불발은 일본군의 사기를 더 높여줄 것이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다”
1945년 7월16일 새벽 4시. 미 남서부 사막도시 앨러모고도 근처 북쪽 넓은 공터.
서울 면적의 4분의 1 정도인 147.6평방km 크기의 지역. 그동안 독일 북부 피네뮌데에서 미군에 투항한 독일의 로켓박사 폰 브라운이 가져온 V2로켓을 실험하던 곳이기도 했다.어둠 속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간이 번개도 쳤다. 4시 정각으로 예정됐던 카운트다운 일정이 취소됐다. 한참 후인 5시10분 께 카운트다운 재개 결정이 내려졌다.
실험장인 ‘트리니티’ 남쪽 16km지점에 있는 베이스캠프에는 최고급 과학자들과 군 장교들이 모여 실험장의 중심에 세워진 300m철탑 위의 원자폭탄을 지켜보고 있었다. 좀더 조심스런 사람들은 32km 밖까지 물러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 과학자와 군 관계자는 비로 인해 방사능과 낙진의 위험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약 20분 후인 새벽 5시29분45초. 카운트다운을 마친 시험용 원자폭탄 ‘물건(gadget)’은 0.016초 만에 공모양의 불덩이가 되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TNT 20킬로톤 규모의 폭발력이었다. 불덩어리 지름은 자그마치 200m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폭발 후의 색깔은 처음에는 황금색이었다가 보라색으로 변했고, 이어 회색으로 바뀌었다가 푸른색이 되었다. 버섯구름은 폭발 상공 12km까지 높이 올랐다. 그리고 북동쪽 160km까지 흘러갔다.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다.”
현장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의 전과정을 지켜보던 맨해튼프로젝트의 책임자 오펜하이머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가 즐겨읽던 고대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이었다. 그건 현실이기도 했다.
■태양이 두 번 떠오르다 베이스캠프에서 북쪽의 거대한 불의 공을 쳐다보던 260명의 관계자들은 약 1~2초만에 마치 뜨거운 오븐이 하늘에서 열을 내는 것같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폭발 40초가 지나자 충격파가 이들 관람객들에게 전해졌다. 그 파동은 이들이 있는 곳보다 10배나 먼 160km 밖에서도 감지됐다.
“이제 우린 모두 망한 거야(Now we all became son-of -bitches).”
실험책임자 케네스 베인브리지 하버드대 물리학과 교수가 인류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보았다는 즐거움과 함께 방사능 낙진 후유증을 걱정하며 내뱉었다.
현장에 있었던 파렐 장군은 “한낮 중천에 뜬 태양보다도 몇배나 강한 빛이 미 전역을 비쳤다”고 당시의 광경을 기록했다.
뉴멕시코 북쪽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에서는 당대의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이 진행해 온 연구의 결과는 이렇게 성공적인 실험으로 끝났다.
겨우 오렌지 만한 크기의 플루토늄(P-239)한덩어리가 일으킨 거대한 소동과 난리법석이 끝난 뒤 원폭개발책임자 오펜하이머가 기지를 떠나고 있었다.
대통령 직속 과학연구개발청(OSRD)청장이자, 원폭개발자금 20억달러를 타낸 전시 미국 과학자들의 총사령관인 버니버 부시가 그에게 경례로 경의를 표했다. 이제 이것과 똑같은 폭탄이 24일 후 일본의 한 도시 상공에서 투하될 것이었다. 미국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독일과 달리 끝까지 버티는 일본의 한 도시에 이 ‘세계의 파괴자’를 내던질 계획이었다. 나카사키 시민들은 트리니티에서 터진 것과 똑같이 설계된 '뚱보(fatman)'란 이름으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쏟아낼 비극의 태양을 맞게 될 운명이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실험
“멀리 떨어진 무기탄약고에 저장된 엄청난 양의 고성능 폭약과 화약들이 폭발했습니다.그러나 이 폭발로 생명을 잃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앨러마고도 공군기지는 트리니티의 원폭 실험후 보도자료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빛의 정체가 무엇이었느냐?”는 수많은 문의가 여기저기서 쏟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군측이 낸 보도자료는 달랑 50단어로 이뤄진 두 문장짜리 눈속임 자료가 전부였다. “첫번째 느낌은 태양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거대한 불의 공이라니! 너무 밝아서 (새벽인데도)비행기 조종석을 밝힐 정도였어요” 당시 이 도시의 동쪽에서 태평양해안으로 가던 해군수송기 조종사 존 루고는 관제탑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남쪽으로 가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을 뿐이었다.
현지의 엘파소헤럴드포스트는 이날 자 신문에서 “엘파소에서 실버시티, 갤럽, 소코로, 앨버쿼키에 이르기 까지 폭발이 관찰됐다”고 썼다.
맨해튼프로젝트 공식기자인 윌리엄 로렌스는 트리니티 실험이 실패했을 경우와 성공했을 경우에 이르기까지 때부터 다양한 보도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트리니티 실험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해 ‘왜 많은 과학자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죽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의 기사를 준비해 두었다.
다행히 그의 실패기사 대신 트리니티 실험 성공기사가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남쪽에서 발생한 태양의 정체를 궁금해했지만 알 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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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이 ‘불의 공’의 정체를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 것은 히로시마에 원자탄 '꼬마(Little boy)'가 투하된 지 3일 만에 나온 스미스보고서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트리니티 실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보고서는 31년이 지난 1976년 5월에야 나왔다.
트리니티의 방사능은 65년이 지난 오늘도 정상방사능 수치의 10배가 넘는다. 인류는 트리니티 이후 2000번 이상의 원폭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