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도둑맞은 ‘최초’의 영예
판즈워스가 2차대전 이후에도 몇년동안 메인주에 칩거했던 것과 달리 데이비드 사노프는 2차대전중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위한 연합군 통합 통신망 구축을 총지휘하는 등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이후 연합군의 승리와 종전의 기운을 감지한 데이비드 사노프는 전력을 다해 TV시장 만개에 대비하고 있었다.
1945년 여름. 종전 직전 데이비드 사노프 RCA사장은 자회사 NBC의 모든 장비는 물론 텔레비전 방송을 업그레이드하라고 독려했다. 그는 꿈에도 그리던 미래의 황금어장 TV시장을 장악할 황금기가 열리고 있음을 너무나도 잘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다짐했다.
“여러분. RCA는 하나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이죠. 어떤 자원이든 필요한 자원은 모두가 제공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한번 일을 벌여볼 참입니다. 엄청난 시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잡기전에 이를 잡을 생각입니다.”
1946년 연말이 되자 385달러짜리 10인치 RCA 텔레비전은 날개돋친 듯이 팔렸다. 이는 RCA의 매출 확대는 물론 폭발적인 NBC방송 광고 증가로 직결됐다.
이미 8년 전인 1934년 프랭클린 연구소에서 판즈워스가 보여주었던 TV시연을 기억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안방에서 RCA TV수상기 속 NBC방송으로 그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동영상)이 하늘을 날아와 내앞에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그 신기함에 눈뜬 사람들은 새삼 TV의 위력과 가능성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NBC드라마시리즈 크라프트텔레비전시어터가 치즈휘즈(Cheeze Whiz)라는 이름의 새로운 제품을 사용하자 엄청난 양의 치즈휘즈가 팔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메시지는 간결했다. NBC를 비롯한 방송계는 물론 산업계 사람들의 생각이 같았다.
“치즈휘즈 뿐 아니다. 뭐든 TV에 광고가 나가면 잘 팔린다.”
RCA의 광고수입은 순식간에 1억달러를 넘어섰다. RCA는 사노프가 세운 자회사 NBC를 통해 여태껏 들인 투자비용을 제외하고도 몇 배나 남기는 수지맞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TV방송사업은 과거 라디오 방송처럼 돈을 벌어들이는 노다지가 되면서 라디오제왕 RCA의 명성을 TV의 제왕으로 이어가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RCA의 인지도는 노르망디상륙 작전을 위한 연합군 통합 통신망 구축을 성공리에 이끌어 ‘장군’이라는 명예로운 칭호까지 받은 사노프의 인지도와 함께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한 때의 유행으로만 치부되던 TV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더 뜨거워졌다. TV열풍은 거세게 불고 있었다.
1947년 가을이 시작되면서 텔레비전제조업체들은 라디오 판매가 최고조였던 25년전보다도 더 거센 시장 수요를 맞이해 환호하고 있었다. 2년 새 미국인이 구매한 TV는 100만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TV시장을 주도하는 선두주자는 80%의 점유율을 가진 RCA였다.
시장지배자가 된 RCA는 TV시장의 선두주자란 영예에 ‘TV의 발명자’, ‘TV의 아버지’라는 빛나는 영예를 추가하기 위한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2년 후인 1949년 1월 7일 저녁.
RCA자회사인 NBC는 30분짜리 “텔레비전 25주년 특별방송(Television’sTwenty Fifth Anniversary Special)’을 시작했다.
미국내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째. 수많은 절대 다수의 시청자들이 TV의 발명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NBC는 ‘TV가 발명된 지 25주년이 됐다’고 방송을 했다.NBC방송은 “그 날이 바로 1923년 12월29일이었으며, 주인공은 이 날 특허를 출원한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TV의 발명자’로 소개된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은 어떻게 TV가 발명됐는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태연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 날 시청자들 대부분은 이후로 일생동안 진짜 TV발명의 주인공인 파일로 판즈워스라는 이름을 듣지도 못할 터였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갔다.
이듬 해인 1950년. 그는 한술 더떠 RCA를 TV발명의 최대 공로자로 만들기 위한 또다른 술책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미라디오제조업협회(RMA)를 상대로 한 로비가 그것이었다.
“협회가 나서서 나에게 ‘텔레비전의 아버지’라는 인정해 주면 안되겠습니까?”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그는 협회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협회가 인정하는 ‘TV의 아버지(Father of Television)’이란 타이틀을 받았다.
그는 즉각 RCA 사내의 전직원에게 내부 메모로 ‘이것은 공식적인 사실’이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됐다.
“오직 데이비드 사노프만이 TV의 아버지였으며, 오직 블라디미르 즈보리킨만이 텔레비전의 발명가로 불렸다. (협회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1950년. 데이비드 사노프가 이렇게 탈취해 RCA사람들에게 안긴 ‘TV의 아버지’와 ‘TV발명의 아버지’란 타이틀은 그로부터 7년간 이어져 갔다.
실제로 인류에게 전자식(브라운관)TV를 만들어 선물한 진정한 TV의 아버지 파일로 테일러 판즈워스는 잊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지만 되지는 않았다. 진정한 TV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밝혀준 것은 우연하게도 RCA와 NBC의 TV기술 및 방송 경쟁사인 CBS였다.
오래 전부터 CBS의 빌 페일리 사장은 RCA의 데이비드 사노프사장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헝가리 출신엔지니어 피터 골드마크 박사를 고용해 데이비드 사노프의 TV개발 계획을 뒤쫓고 있었다.
페일리 사장은 1934년 8월 판즈워스가 프랭클린연구소에서 최초의 전자식TV를 시연한 것을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꼭 2년 만인 1936년 7월 뉴욕 라디오시티에서의 RCA가 TV시연회를 가졌었지만 판즈워스만 못했던 것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CBS는 RCA와 달랐다. 빌 페일리는 오래 전 골드마크 박사를 필라델피아의 필코 연구소로 보내 판즈워스와 TV개발의 문제점 등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CBS는 스튜디오를 꾸미기 위해 판즈워스로부터 텔레비전카메라와 수상기 브라운관까지 사들였고 당시 스튜디오엔 판즈워스의 후원자 조지 에버슨과 제스 맥카거도 참석했었다.
CBS는 1937년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에 RCA보다 큰 스튜디오를 만들고 크라이슬러빌딩꼭대기에 전송기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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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여름. 판즈워스는 과거의 거래인연이 있던 CBS의 한 프로그램의 초대손님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최초의 TV발명가가 자신의 정당한 타이틀을 탈취당한 지 7년 만이었다.
판즈워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TV방송에 출연한 이 CBS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는 전국망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TV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리기에는 그 한번의 출연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