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을 TV처럼 만들라
스마트폰, TV로 전 세계 시장을 평정한 삼성전자에 생활가전은 여전히 아픈 고리다. 매해 신제품을 내놓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이면서도 텃밭인 국내 시장에서조차 경쟁사에 밀렸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말 'TV 전문가' 윤부근 사장(59)에게 삼성 생활가전사업부(CE)를 맡겼다. 윤 사장은 최지성 부회장과 함께 삼성 TV를 글로벌 1위 장기독주 체제로 만든 주역으로 꼽힌다. TV 시장 경험을 가전에 옮겨 자존심을 세우라는 특명을 윤 사장이 떠안은 셈이다.
윤부근 사장은 자신의 임무를 정확히 알았다. 삼성전자 관계자에 따르면 윤 사장은 연초 집무실을 아예 생활가전사업부 쪽으로 옮겼다. 직원들의 출근 시간도 30분가량 앞당겼다. 좋아하던 술도 줄였다. 가능한 모든 시간을 현장에 투입했다.
전공인 TV 관련 행사에도 발길을 끊었다. 지난달 삼성이 세계 첫 양산제품이라 일컬으며 준비한 'OLED TV' 공개장에선 윤 사장 대신 김현석 부사장이 기자들을 맞았다.
지난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직원들이 자신을 '윤푸근'이라 부른다던 부드러움도 올해는 찾기 힘들다. 가전은 다른 전자제품 기기에 비해 보수적인 분야다. 제품 교체주기도 길어 쉽게 1등이 바뀌기 어렵다. 이를 뒤집으려면 남들보다 긴장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주문했다.
스스로가 현장 출신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해 조직을 조이고 기름칠 하는데 효과를 냈다. 과거 윤 사장과 함께 사장으로 승진한 입사 동기들 다수가 구조조정본부 출신이거나 재무통이다. 반면 그는 지난 1978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래, 경영혁신팀 SCM 담당 이사,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글로벌 운영팀장, 개발팀장 등을 맡으며 현장 경영에 매진했다.
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평소 윤 사장이 현장 엔지니어들에게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했다. 제품이 1등이 되려면 중요한 요소들이 많다. 마케팅이나 영업능력이 그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라도 제품 자체의 경쟁력이 없다면 영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윤 사장의 신념이다.
윤 사장이 CE 부문을 맡은지 6개월이 흐른 지금, 성과는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증권가에선 삼성전자 가전 사업부가 올해 안에 흑자로 전환할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내놓는다.
특히 냉장고는 세계 1위인 월풀을 근소한 차로 따라붙었다. 동남아를 비롯한 신흥시장에서 삼성 냉장고 성장세가 컸다. 보쉬 지멘스, 일렉트로닉스 등 지역 내 강자가 많은 유럽시장에선 조금씩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는 추세다.
일본 업체 영향력이 큰 에어컨도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업체들이 나날히 성장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하반기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 주요 가전의 프리미엄 신제품을 출시해 수익성을 개선하고, 해외 시장을 공략한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성과엔 지난 반년간 현장을 뛰어다닌 윤 사장의 노력이 숨어있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윤 사장은 지난 6개월간 사무실에 좀처럼 앉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 유럽, 동남아 등 글로벌 영업 현장서 살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윤 사장이 북미, 구주, 동남아 가리지 않고 글로벌하게 출장을 다닌다며 해외서 있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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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사장은 최근 쫄지말고 저질러라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지난 3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도 위기가 기회라며 이같은 메시지를 강조했다.
여기엔 삼성 TV를 글로벌 1위로 만들며 겪었던 자신의 경험이 담겨있다. 그는 이 강연에서 2009년 국제금융위기로 모두가 고가 TV 개발을 말렸을 때 오히려 과감히 도전했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뒀다고 강조했다. 윤 사장이 TV에서 가전으로 옮겨심겠다는 성공 DNA가 이 한 문장에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