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사진제국의 영광과 좌절

1888년 9월 4일 조지 이스트먼, 카메라 기술 특허획득

일반입력 :2010/09/03 20:10    수정: 2010/09/12 23:47

이재구 기자

우연히 빠져든 카메라기술의 세계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으레 그렇듯이 그가 사진기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본 것을 사진에 담아오라고.‘”

1877년 뉴욕 근교. 로체스터저축은행에 다니는 작은 키의 23살 미국 청년은 여행을 준비하다가 지인으로부터 이같은 권고를 받았다. 목적지는 카리브해의 산토 도밍고였고 여행목적은 토지투자 가능성 조사였다.

청년 조지 이스트먼은 웬일인지 이 특별한 여행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사진 장비는 구입했다.

청년은 이 해 가을부터 이듬 해 초에 걸쳐 당시 유행하던 복잡한 사진기술인 콜로디온 사진처리기법을 배울 결심을 했다.

1839년 다게르가 은판 기술을 개발한 후 50년대에 등장한 ‘음화’로 불리는 사진제작과정은 몹시도 힘드는 것이었다. 흔히 예술가들이 겪는 극도의 인내와 노력에 버금가는 것으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유리에 각종 화학물질과 약품을 뿌렸다가 닦아내고 물로 씻고 말리는 지루한 공정 외에 또다른 과정이 더해져야 했다.

그런데도 사진기술에 관심이 생긴 청년은 1877년 11월13일 49달러 58센트를 들여 카메라와 관련장비를 구입했다. 그리고 전문사진가 조지 먼로를 초빙, 교습비 5달러에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878년 3월 영국사진저널에 찰스 베닛이란 인물이 당시 유행하던 습식보다 진보된 건식 감광유제 기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를 이용하면 건판사진 재료를 직접 준비할 필요도 없고, 현장에서 현상하지 않아도 됐다. 사진기술의 혁명이라 할 만 했다. 조지 이스트먼은 2월부터 이 잡지를 구독,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이 해 여름내내 이스트먼은 은행에서 퇴근하는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실험에 몰두했다.1881년 8월. 청년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순간이 왔다. 이스트먼이 다니던 회사의 상사가 떠났을 때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자리가 은행임원의 친척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의 위대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일반 대중을 사로잡은 단순화의 마술

“과연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사진기를 단순화해 대량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스트먼은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어 봤고 그 결과 “대중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그는 필름, 필름 제작공정,필름 롤 홀더를 사진산업의 세가지 기본 요소로 보았다. 그리고 회사설립초기부터 이들의 개발과 함께 특허획득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1887년 여름 조지 이스트먼은 대량 시장을 목표로 하는 단순한 카메라 개발에 착수했다. 그해 12월 드디어 가슴에 매다는 소형 롤 홀더 카메라를 만들고 이름을 붙여야 하는 순간을 맞았다.

그는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의 첫 글자인 K로 시작하는 ‘코닥(Kodak)이란 브랜드를 생각해 냈다.

이듬해 6월 이스트먼은 10년 노력의 결실을 시장에 내놓았다. 세계최초로 일반인용 카메라가 시장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신형 코닥카메라의 가격은 25달러였다. 카메라의 크기는 제품 케이스를 포함, 길이 16.51cm, 폭 8.25cm, 높이 9.52cm였다. 제품은 100장 분량의 필름 롤이 상자안에 담겨 출하됐다.

사진찍는 사람이 할 일은 다음 프레임으로 넘기기 위해 키를 돌리고 셔터를 누르기 위해 끈을 잡아당긴후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였다. 100장이 모두 촬영(빛에 노출)된 후 카메라를 다시 코닥의 로체스터공장으로 보내면 이스트먼 코닥이 필름을 빼내어 사진을 현상한 후 새 필름을 넣은 카메라와 사진을 고객에게 함께 보내주는 것이었다. 비용은 10달러였다.

이로써 사진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광학과 화학이 결합한 산물인 사진은 삶과 죽음, 전쟁과 평화,질병, 기아, 공포와 폭력,질병, 기근 등 인류와 자연을 담는 절절한 기록이 됐다. 화가의 역할과 입지를 위협하는 도구로 여겨졌으며 인상파에게 빛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1달러짜리 카메라가 시장을 흔들다

“누르기만 하세요. 나머지는 저희에게 맡기세요.(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이 해 6월 이스트먼은 카메라를 내놓으면서 오늘 날까지 산업계에서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문구로 광고를 시작했다.

당시 등장한 거대기업 가운데 디자인에서는 코카콜라가 단연 우위였고, 지명도에서는 철강왕 카네기의 US스틸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제품의 혁신적 특성을 코닥보다 더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는 광고는 없었다.

3개월 후인 9월 4일 미 특허청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이 일반인도 사용하기 쉬운 세계최초의 코닥 카메라 특허획득 소식이었다. 미국특허 388,850호였다.

이스트먼은 시장조사도 없이 제품을 만들고 광고했다. 이러한 가운데 제품혁신과 판매촉진운동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00년 코닥의 브라우니 카메라의 출시였다. 이 제품의 출시는 1908년 등장한 포드의 T형자동차나 당시 여성의 스커트모양을 본뜬 192밀리리터짜리 코카콜라병처럼 사진기 제조업계에 사진기의 표준을 제시했다.

“1달러면 카메라를 살 수 있고 15센트를 더 내면 필름 한 롤을 추가로 얻는다.”

이스트먼은 1877년 자신이 50달러에 구매했던 사진기를 사람들에게 단돈 1달러면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자신은 5달러나 들여 배웠던 사진기 조작법도 아주 간단해졌다. 저 유명한 광고문안대로 ‘누르기만 하세요’가 조작법의 전부였다.

브라우니카메라 가격은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경쟁사들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고지였다. 워낙 마진율이 낮았지만 사내유보금을 사용하면서까지 20년 가까이 고생하면서 기술혁신에 나선 덕분이었다. 코닥은 이를 통해 20세기의 경쟁방식을 보여주며 업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즉각 카메라’ 폴라로이드, 제국을 넘보다

1912년이 되자 코닥은 독보적 사진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장난감’은 수백만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어느새 사진은 대중들의 삶의 일부이자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스트먼이 “특허를 통해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면 전화와도 맞바꾸지 않겠다”던 코닥을 위협하는 또다른 혁신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1943년 여름. 군수업체에 다니는 에드윈 랜드는 그의 아내 헬렌, 세살 난 딸 제니퍼와 함께 뉴멕시코의 산타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사진을 보여주세요, 아빠!”

에드윈은 사진을 찍은 딸의 요청에 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사진사에 남을 혁신적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사진을 찍고 나서 즉시 컬러사진을 얻을 수 있는 카메라’였다. 50여년 전 조지 이스트먼의 카메라는 혁신이었지만 '즉석에서 사진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이상 혁신이 아니었다.

1년 반이 지난 후, 그의 회사는 뉴욕의 피닌슐러 호텔에서 최초의 즉석 카메라를 시연할 수 있었다. 최초의 제품인 ‘모델 95’는 1.8kg의 무게에 거의 100달러의 가격이 매겨졌다. 1948년 뉴욕 조던 메이시 백화점에서 독점 판매되던 제품은 순식간에 미 전역으로 퍼졌다.

1960년 말 랜드는 작고,우아하고, 값을 지불할 만한 카메라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카메라를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작고 ,완전하고,우아하게 만들어라.”

첫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지 30년 만에 10장이 찍히는 SX-70모델이 만들어졌다. 이 제품은 소개된 지 5년 만에 10억달러가 넘는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코닥을 괴롭혔음은 물론이다.

■사진제국의 영광과 좌절

하지만 카메라왕국의 코닥에게 폴라로이드만이 위협은 아니었다. 1948년 발표된 트랜지스터란 기술은 30년이 지나도록 전혀 카메라왕국에게 불온한 기운을 보이지 않았다. 고체물리학인 반도체는 빛과 화학으로 이뤄진 카메라 제국에 별 위협이 되지 않는 듯 싶었다.

징후는 1973년 실리콘 밸리에 있는 페어차일드라는 반도체 회사가 소개한 칩으로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벨연구소의 원천기술로부터 나온 1만화소의 CCD칩은 카메라산업을 뒤흔들 디지털카메라 혁명의 불씨였다.

2년 후 1975년 코닥의 엔지니어인 스티븐 새슨이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했다. TI 출신인 그는 페어차일드가 만든 1만화소 칩을 이용했다. 반도체에 일찍 눈뜬 소니는 1981년 마비카라는 2인치 디스크를 이용하는 제품을 소개했다.

코닥이 다른 기업들에게 눈돌리기엔 사진산업은 순탄했다. 하지만 곧 필름이 필요없는 디지털카메라는 코닥의 주력인 필름산업과 필름 카메라를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디지털’은 코닥에게 퇴조를 가져다 주는 역풍과도 같았다.

‘코닥, 디지털 혁명을 끌어안다’

2004년 1월 13일. 전통적인 필름 카메라 사업의 중단을 발표하자 BBC는 이러한 제목으로 보도했다.

IDC의 분석가인 크리스토퍼 추트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인물 사진사와 결혼사진사들이 디지털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소식은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해 4월 8일. 74년 간 유지돼 온 사진제국의 명성이 순식간에 빛을 바래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의 공업지수인 다우존스인덱스에서 퇴출됐다는 소식이었다. 19세기에 출발한 AT&T와 코카콜라는 리스트에 건재했다.

어느 새 디지털카메라, 캠코더 시장은 소니와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한,일 양국의 전자회사가 주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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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닥은 2009년 70억달러의 매출, 2억1천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19세기부터 함께 커 온 동기 코카콜라는 892억달러에 순익 58억달러,분할된 AT&T조차도 매출 215억달러,순익 125억달러를 기록했다.

최근 코닥은 비주력 사업 매각 및 최신 프린터제품의 출시 등을 통해 ‘사진’으로 대표되는 영상사업 종가의 체면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2006년 모토로라와 10년 간의 모바일이미징 기술 크로스라이선싱 및 마케팅협력 계약을 맺은 것은 이러한 노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