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세상에! 기계가 말을 하다니...

1887년 9월 1일=에밀 베를리너, 그래머폰 특허 출원

일반입력 :2010/08/26 20:39    수정: 2010/08/29 08:22

이재구 기자

실린더통에 소리를 기록하다 .

“미세한 바늘이 그을음을 입힌 원통 표면의 흔적을 기록한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을 내구성 원반에 홈으로 새겨 소리를 재생할 수 있지 않을까?”

1877년 4월 파리에 살던 시인,화가이자 발명가인 샤를 크로스에게 이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실 그의 생각은 20년전 레옹 스콧이 만든 소리를 시각적인 흔적으로 기록하는 장치인 포노토그래프(phonautograph)를 개량한 것이었다. 이 기계는 소리에 반응해 종이 원통에 선을 그었지만 그야말로 소리의 길, 즉 사운드 트랙을 만들었을 뿐 재생하진 못했다. 이에따라 과학자들의 음성 분석용으로만 판매되었다.

크로스는 우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진동(소리)의 흔적을 원반의 홈에 새겼다. 원반운 나팔관 끝의 바늘에 닿도록 했다. 그 아래 있는 원반의 밑받침을 회전시켜 원반이 도는데 따라 바늘이 소리를 읽어내도록 했다. 읽혀진 소리는 바늘과 연결된 진동막(다이어프램)을 통해 1차로 확대됐고 나팔관스피커 끝으로 증폭된 소리가 나오도록 했다.

그는 이를 정리해 봉투에 넣고 ‘청각현상의 기록 재생 과정 해설’이라고 써서 파리과학아카데미로 보냈다. 하지만 크로스의 논문을 받은 아카데미에서 도무지 소식이 오질 않았다.

“하루빨리 봉투의 내용을 출판해 주시길 바랍니다.”

1877년 겨울. 뉴욕에서 에디슨의 발명 소식이 들려오자 크로스는 초조함 속에서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불행히도 크로스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장비를 만들어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고 에디슨은 먼저 축음기 특허를 내 버렸다.

에디슨의 특허는 우선 눕혀진 원통형 실린더를 옆구리의 크랭크 손잡이로 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실린더를 수직으로 읽어내는 바늘위에 부착된 소리확대판(마우스피스)에 직접소리를 질러 이를 기록하도록 한 것이었다.

소리를 재생하려면 원통에 바늘을 올리고 크랭크손잡이로 실린더를 돌리면 되는 방식이었다.

세상에 기계가 말을 하다니!

“메리에게는 어린양이 있었네.(Mary had a little lamb.)...“

1877년말. 에디슨은 최초의 시연회를 하면서 유성기(Phonograph)의 바늘위에 붙은 마우스피스에 대고 동요 몇소절을 부른 후 원통을 다시 회전시키자 잠시 후 그 소리가 재생되어 들려왔다.

“세상에 기계가 말을 하다니!”

에디슨의 조수 존 크루에시가 놀라서 외쳤다.

‘말하는 기계(Talking Machine)’로 알려진 에디슨의 유성기는 이처럼 단지 말한 것을 기록하는 장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것은 처음 맞닥뜨리는 사람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에디슨은 1877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진도 놀래켰다. 그가 편집실을 방문해 탁자위에 단순하게 생긴 소형 장치를 올려놓고 손잡이를 돌리자 기계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마음에 드나요? 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 안녕히...“

이듬해 봄 에디슨은 이 놀라운 발명품을 세계 각지에서 실연해 보일 것을 대리인에게 지시했고 이 뉴스는 과학계는 물론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물론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사기꾼. 복화술을 썼어. 엄격한 조건아래서 다시 시연해 봐야 해.”

1878년 3월 11일 프랑스 파리과학아카데미. 이 단체의 회원이자 물리학자이며 의사인 부이오가 벌떡 일어나 에디슨의 대리인을 비난하고 나섰다.

에디슨의 대리인이 “존경하는 과학아카데미 회원 여러분께 축음기를 소개합니다”라고 말하고 이를 재생시켰을 때 청중의 놀라움은 그 정도로 큰 것이었다.

1878년 4월11일자 네이처는 에디슨의 발명에 대해 ‘청각에서의 세기적 경이’라고 극찬했다.

에디슨의 유성기를 구시대의 물건으로 만들다.

에디슨은 에디슨스피킹포노그래프컴퍼니(Edison Speakin Phonograph Comnpany)를 만들어 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제품의 판매에 나섰다.

하지만 이 축음기는 소리기록을 보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재생할 때 바늘에 주석섬분의 박막을 입힌 원통표면 홈이 닳아서 몇 번 재생하지 않았는데도 금세 소리의 흔적이 없어졌다.

에디슨 발명후 10년째인 1887년. 이제 부드러우면서도 흔적을 지속시켜 불 만큼 견고한 밀랍원통이 도입되었지만 사람들은 보다 효율적인 소리저장장치를 기대하고 있었다.

“납작한 표면이라면 실린더보다 정확하게 소리를 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독일 하노버 출신으로서 미국에 귀화한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는 이런 생각을 품고 에디슨의 유성기보다 나온 소리저장 및 재생장치 개발에 골몰했다.

그는 셀룰로이드, 딱딱한 고무 등 더욱더 강한 재료를 이용해 원형디스크로 소리를 저장하는 실험에 몰두했다.

워싱턴의 전형적인 블록가옥의 3층에 세든 에밀 베를리너의 연구실은 전선줄과 배터리, 기름 냄새 등으로 가득 찼다.

그는 금속 위의 왁스코팅을 잘라내 산에 담근 디스크에 소리를 복각해 내려는 시도를 했다. 결국 셸락(shellac)이란 도료를 바른 딱딱한 원반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소리를 저장하는 홈(groove)을 파기에 뛰어난 재료였으며 마스터디스크를 이용해 값싸게 대량생산도 가능한 방법이었다.

드디어 베를리너는 기계적으로 생산된 소리를 대중화할 수 있는 양산의 길을 튼 셈이었다.

축음기 대중화의 길을 연 베를리너

베를리너는 이제 보다 나은 플레이어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4월에 자신이 발명한 마이크로폰을 나팔관스피커 끝과 바늘사이에 부착시켰다. 바늘이 디스크의 홈을 긁으면서 연주될 때마다 소리가 증폭돼 나팔관스피커로 나오도록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그래머폰(Gram-o-phone)이 완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거의 완벽한 소리의 재현이 가능해졌음을 확인했다.

1887년 9월 1일 그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이 7인치 레코드 플레이어 메커니즘을 미국과 독일 특허청에 특허출원했다. 벤졸린용액 밀납으로 코팅된 아연디스크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아연디스크는 크롬산에 담가 에칭방식으로 홈을 만드는 것이었다. 에디슨의 축음기와는 내구성에서 비교가 안됐다.

“미래세대는 한번에 20분을 담을 수 있게 될 겁니다. 5분은 아이가 재잘거리는 소리, 5분은 즐거워하는 소리, 5분은 남자의 반향, 그리고 5분은 죽음의 침상에서 내뱉는 약한 소리입니다. 불멸과의 통신같지 않나요?“

특허 출원 이듬해인 1888년 5월16일 베를리너는 필라델피아 프랭클린연구원에서 공식 강연을 통해 미래를 향한 여행에 대한 자신의 예언을 전했다. 그 당시로선 그럴 만 했다. 1948년 6월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60분짜리 12인치 롱플레이(LP)원반을 내고서야 이 예언은 확실하게 깨진다.

베를리너는 자신의 그래머폰을 생산하는 엘드리지 존슨이 이끄는 빅터(Victor)사에 몸담고 있었다. 이 회사는 ‘빅토롤라(Victorola)'라는 브랜드로 유명해져 가고 있었다.

붉은 상표가 음반 중앙에 붙여진 4분짜리 단면 음반이 1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당시 레코드는 이태리 출신의 세계적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 같은 가수가 부른 극히 짧은 곡에 또 한곡 정도가 억지로 오를 정도였다.

1893년 베를리너와 그와 친구들은 US그래머폰(United States Gramophone Company)를 설립한다.

음악을 듣는 강아지 브랜드

“이 강아지그림을 사시겠습니까?”

1899년 영국의 화가 프랜시스 배로드는 '니퍼(Nipper)'라는 이름의 불테리어 강아지 그림을 에디슨 유성기회사에 팔려다가 보기 좋게 퇴짜 맞았다.

후일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테리어강아지로 너무나도 유명해진 이 상표는 사실 주인의 목소리를 듣는 개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그림은 세상을 떠난 자기 형의 목소리를 에디슨유성기로 재현해 듣고 있는 애완견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그림속의 유성기를 ‘음반식’ 축음기로 바꾼다면 그 그림을 사겠소.”

1899년 베를리너는 그림속의 유성기의 실린더를 자신의 회사에서 만드는 턴테이블방식의 그림으로 수정하자고 제의해 이를 구입했다.

1900년 7월 16일 베를리너그래머폰컴퍼니(후에 EMI로 합병)는 상표명을 ‘주인의 목소리’라는 의미의 ‘His Master's Voice (HMV)’로 바꿔 채택했다.

이 친근한 강아지 상표는 1901년 프랭크 바타의 “헬로 마이 베이비”란 노래음반에 붙여져 20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투자자를 끌어 들인 베를리너가 소액주주로 전락하면서 변동이 이어졌다. 그가 세운 미국회사(3개로 분리됨)는 1924년 빅터토킹머신에, 5년 후인 1929년엔 다시 RCA로 넘겨진다.

하지만 ‘축음기로 주인의 목소리를 듣는’ 저 유명한 강아지 ‘니퍼’ 상표는 RCA의 전성기인 70년대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상표의 하나로 수십년간 명성을 유지한다.

눈부신 레코더의 혁명과 레코드의 몰락

한편 음반 녹음 외에도 새로운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있었는데 바로 자기(마그네틱)녹음이었다. 1898년 발데마르 풀젠은 강철 리본에 소리를 자기적으로 기록하는 텔레그래폰을 만들었다.

“자성을 띤 금속가루를 덮은 종이와같이 가늘고 긴 절연물질이 있다면 더욱 나은 녹음매체가 될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자성물질은 자기 녹음의 미래가 되었다.

1963년 필립스가 자사가 개발한 최초의 소형카세트를 베를린 라디오&TV박람회에 출품한다.

이는 70년대 카세트라디오전성기를 이으면서 70년대말 워크맨 신화로 이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또한번 혁명적 음악 재생매체의 물결이 오면서 카세트테이프 관련기술도 불과 20년만에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1982년 필립스와 소니가 공동으로 개발한 최초의 컴팩트디스크(CD)였다. 사람들은 새 기기를 구입해야 한다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LP나 카세트테이프대신 CD플레이어를 구매했고 이는 음반시장의 판도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독일의 거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CD에 비하면 다른 것은 모두 가스등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CD의 음질은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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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또한 MP3플레이어라는 디지털저장방식의 기기가 등장하면서 급속히 빛을 잃게 된다. 오늘날 아이팟은 그 대명사가 되어있다.

2004년 세계적인 LP음반 판매회사인 타워레코드사가 파산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