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로스 페로의 EDS, SI산업을 열다

1962년 6월 27일=로스 페로, EDS설립으로 IT서비스산업 열다

일반입력 :2010/06/24 18:08    수정: 2011/04/17 23:14

이재구 기자

■부와 명성, 그리고 권력에의 의지

“날 뽑아주십시오. 워싱턴을 뒤흔들어 놓겠습니다.”

1996년 가을 CBS와 NBC방송의 선거캠페인에 짧은 스포츠형 머리로 등장한 초로의 신사는 노골적인 지지요구 발언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 인상적인 연설은 TV 시청자들의 마음을 휘젓기에 충분했다.

두 방송국에서 각각 38만달러와 50만달러를 주고 30분이란 긴 TV광고시간을 사들인 그는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 기존의 모든 유세방식을 단 한방에 날려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시,클린턴 후보와 가진 3자 TV토론에서 저돌적이고도 진지한 비즈니스맨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텍사스 카우보이 출신인 신사의 이름은 로스 페로(Ross Perot)였다.

그는 1992년에도 미 대선판세를 통째로 온통 흔들며 미국민과 전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주인공이기도 했다.

“국민들이 나를 50개 주에서 후보로 등록시켜 준다면 출마할 것입니다.”

그 해 2월 CNN스튜디오에서 굵은 뿔테안경이 트레이드마크인 명 사회자 래리 킹이 대선출마 의향을 묻자 그렇게 거침없이 받아넘긴 그였다.

거부로서의 로스 페로의 명성을 웃도는 것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였다.

1969년 베트남전 전쟁포로 구출시도, 1979년 이란에 억류된 EDS직원의 성공적 구출작전 등의 화려한 경력은 미국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92년 대선 초반 여론 조사에서는 조시 부시와 클린턴을 앞설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지지자들은 그의 호전적 스타일과 뚝심에 열광했고 6월29일자 타임지는 그의 사진과 함께 ‘아무도 완전하지 않다’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로 등장한 그를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대선결과는 19% 득표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정치 역정보다도 더 화려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IT서비스 산업에서의 그의 신화적 업적과 성공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

■일언지하에 거절 당한 혁신적 아이디어

“컴퓨터를 살 여유가 없는 기업에게 남는 용량을 임대하는 새로운 사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1962년 초 IBM 텍사스 댈러스지부의 젊은 영업사원 로스 페로가 건의서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일언지하에 날아갔다.

“바보같은 생각 말고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하지. 쓸 데 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새로운 것이었다. 4년밖에 안됐지만 가장 성공적인 영업사원으로 두각을 보인 그의 경험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IBM내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수익성이 높은 거래를 맡고 있었다. 양대 고객은 사우스웨스턴생명보험사와 텍사스블루크로스라는 은퇴후 의료보험를 담당하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사우스웨스턴은 막 구입한 IBM7070컴퓨터의 용량이 필요이상으로 크다며 반품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로스 페로의 ‘사소해 보이지만 혁신적인’ 발상이 나오게 된다.

그는 결국 7070컴퓨터의 데이터처리 용량의 여유분을 빌려 쓸 회사를 찾아내 반품직전의 컴퓨터를 되돌리는 성과를 일궈낸다.

페로는 그 해 1월이 가기도 전에 이미 130만달러짜리 7070컴퓨터를 판 데 이어 반품문제까지 수습함으로써 자신의 연간 영업목표를 달성해 버린 것이었다. 회사는 그에게 상사보다도 더 높은 영업커미션은 지불하지 않으려 했다. 더 나쁜 것은 실적을 초과달성했기에 향후 6개월간 놀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망한 로스 페로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 곳은 댈러스의 한 이발소였다.

“대다수의 인간은 조용한 절망의 인생을 산다.”

리더스다이제스트를 넘기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경구였다.

그리고 페로는 ‘자기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

■EDS, 컴퓨터서비스의 신천지를 개척하다

1962년 6월 27일. 세계 컴퓨터시장 점유율 70%로 말그대로 '컴퓨터의 모든 것'이던 IBM에 사표를 던진 이 해군장교출신의 청년은 서른두번 째 생일날 회사를 세웠다.

그에게 컴퓨터코드나 프로그래밍 지식은 전무했다. 교사였던 아내 마고가 텍사스주 창업 등록비로 1천달러짜리 수표를 빌려 주었다. 회사이름은 ‘전자적으로 기업의 데이터를 처리해 준다’는 의미의 ‘EDS(Electronic Data Service)’였다. 세계 최초의 IT서비스업체, 즉 시스템통합(SI)업체가 등록되는 순간이었다.

페로는 이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시장이 있다는데 자신의 존재와 돈과 시간을 기꺼이 걸기로 했다. 처음가는 길인 만큼 고도의 정교한 SW를 제공하기보다는 고품질 서비스제공업체를 지향했다.

자신이 창립멤버이자 직원인 1인기업이었다.

“EDS의 시작은 수개월에 걸친 공포였다. 돈이 전혀 없었고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페로가 후일 언급했듯이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은 험난했다.

“IBM시절 고객이셨으니 제가 연 2만달러에 데이터프로세싱컨설턴트로서 계속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77번이나 제안을 하고 거절당하는 곡절 끝에 최초로 텍사스블루크로스-블루쉴드와 계약했다. 이 계약성사로 비로소 월세 100달러의 EDS사무실을 차렸다. 이어 7070컴퓨터이용기업 100개사와 접촉하면서 고객을 늘려갔다.

EDS는 2년 만인 1964년 말 열두어명의 직원에 총수입 40만달러, 순익 4천100달러를 내는 회사로 성장했다. 이듬해 생긴 노인의보제도와 국민의료보조프로그램이 고객사를 늘려주었다. 창업 3년 만에 미국내 11개 주의 의료청구서 발송체제 전산화서비스를 맡게 되면서 성공의 길이 열렸다.

후일 그는 “내가 IBM에 남았다면 나는 중견 간부쯤 되어 온갖 곤욕을 겪다가 일찌감치 정리해고 당했을 것”이라고 회고 했다.

■가장 빨리, 가장 큰 부자가 된 텍사스인

“독수리는 떼를 지어날지 않는다.”

페로는 이러한 슬로건을 내걸면서 ‘할 수 있다’는 뚝심있고 긍정적인 자세를 가진 직원들을 뽑았다.

남을 따라하지 않는 독자적 스타일의 혁신적 사고를 가진 이들 직원이 EDS를 키워주었다.

1968년 전국 의료보험전산서비스를 맡게 된 EDS는 이제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업자로 성장했다. 이 해 총매출 750만달러 가운데 240만달러가 순익이었다.투자자들은 이 경이로운 실적에 매료되었다.

‘텍사스 호랑이’란 별명의 로스 페로는 이 기회를 날렵하게 낚아챘다. 1968년 9월 기업을 공개하며 EDS주식을 상장했다.

대부분의 주식들이 연 수익의 10~20배 정도에 거래됐지만 EDS는 달랐다. 증권 인수인은 무려 118배에 해당하는 16달러 50센트에 주식을 발행했다. 폐장직전 23달러로 오른 주식으로 로스페로의 순자산은 2천300만달러가 됐다. 며칠 새 160달러로 오른 주식으로 그는 '벼락' 억만장자 대열에 올랐다.

이즈음 뉴욕증권거래소는 중개업체들이 서류작업을 마칠 수 있도록 수요일 하루를 휴장해야 했을 정도였다.

페로는 사업을 시작한 지 6년만에, 그리고 IBM으로 사회에 발을 들인 지 11년만에 억만장자가 됐다. 그는 말그대로 ‘황소의 뿔을 잡은’ 사나이가 됐다.

”가장 빨리, 가장 큰 부자가 된 텍사스인(fastest, richest Texan)“

포춘지는 페로를 표지인물로 다루면서 이같은 내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상장 1년 6개월이 지났을 때에도 EDS의 주가는 여전히 162달러 50센트라는 고가를 유지하고 있었고 페로의 재산가치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스 페로의 유산’에 기대는 글로벌기업들

“EDS를 인수해 GM을 첨단하이테크 회사로 만들어 보고 싶소.”

1984년 자동차를 하이테크산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로저 스미스 GM회장이 페로에게 인수의향을 내비쳤다. GM이 25억달러에 회사를 인수하되 페로가 최대개인주주이자 오너로서 회사를 경영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참여이후 GM안팎에서 불협화음이 끊일 날이 없었다.

“GM의 자동차 한대가 설계돼 출하되려면 미국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는 시간(6년)만큼 걸린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렸다. GM과 결별키로 한 그는 7억4천만달러에 지분을 모두 처리하고, 18개월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페로시스템즈를 세운다. 88년 또다시 회사를 상장시켜 36억달러의 가치를 창출한 그는 이제 ‘마이더스의 손’으로 떠 올랐다.

그로부터 20년, 성장의 한계를 느낀 글로벌 IT기업들이 페로의 유산을 잇따라 떠안기 시작했다.

2008년 3월 HP는 EDS를 139억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00년 PwC라는 IT컨설팅서비스회사를 인수하려다 불발에 그치고 IBM에게 양보한 이래 드디어 꿈을 실현한 셈이다.

이듬 해 9월 마이클 델회장은 페로시스템스를 39억달러에 인수한다는 발표 후 흡족하게 말했다.

“이번 인수는 델의 기업솔루션능력을 확대하고 페로시스템의 힘을 전세게고객에게 더욱더 발휘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로스 페로는 컴퓨터 코드를 하나도 몰랐으면서도 산업전반을 전산화했고 그 안에서 IT서비스가 주도적으로 활약하는 EDS와 페로시스템즈를 만들고 키운 천재사업가였다.

전세계 경영계는 그런 그의 성공을 이룬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특히 ‘할 수 있다’는 자세를 높이 사고 있다. 하지만 로스 페로는 사상 최초로 데이터프로세싱서비스 즉, 오늘 날의 IT서비스라는 새로운 산업영역을 개척한 선지적 경영자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이름에 빛을 더하게 될 전망이다.

2010년 3월 오바마 미국대통령의 의료개혁법이 의회를 통과해 20104년부터 시행될 전망인 가운데 페로의 유산은 글로벌 IT기업들의 새로운 캐시카우로 각광을 받기 시자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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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에 억만장자가 된 청년은 80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IT시대의 최강자인 글로벌기업들이 탐내는 황금거위를 2개나 만들어 낸 마이더스의 손으로, 연금술사로 우뚝서 있다.

로스 페로는 2009년 포춘이 선정한 미국 400대 부자 가운데 85위에 랭크됐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