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로 다시 꿈꿀 수 있는 겁니까?--정경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

[김경묵의 인물탐구-2]

일반입력 :2010/01/24 17:16    수정: 2010/01/26 16:43

대담=김경묵 지디넷코리아 편집국장 정리=황치규기자

힘들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지난달에는 입까지 갈라졌어요. 세분 원장이 했던 것을 혼자해야 했으니...

웃고 있지만 정경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은 '있는데, 없다'고 가식떨지는 않겠다는 표정이다. 오히려 당연히 힘들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뻔한 얘기 왜 꺼냈냐?'는 뉘앙스도 풍긴다.

힘들기는 좀 힘들었나보다. 그의 말처럼 안힘들다고 하는게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8월 정부가 공공기관 통폐합을 발표하며 한국SW진흥원, 한국전자거래진흥원,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을 합쳐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을 출범시킨 이후 정 원장에게는 숨가쁜 시간의 연속이었다. 통합으로 조직은 어수선하고, 여기저기 오라는데는 많고, 정책 수립도 미룰 수 없는 일이고, 말그대로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는 '카더라통신'에서도 이슈메이커였다. NIPA가 출범하자마자 관련 업계에선 살벌한 말들이 나돌았는데, 대충 이런 얘기들이다. 통합으로 직원들이 많이 잘릴 것이라던데.., SW육성 정책은 약화되겠군, 역시 이 정권은 IT를 홀대한다

조직 통합과 SW생태계 복원의 메신저 역할을 맡은 정 원장에겐 하나같이 듣기 거북한 것들이었다. 이질적인 3개 조직을 하나의 코드에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시작부터 곱지 않은 시선에 휩싸였으니...

더구나 그가 담당하는 SW산업은 '막장'과 '드림리스'(Dreamless)라는 문구가 상징하듯, 젊은이들이 웬만하면 피하려하는 분야가 아니던가. 제값받기 힘들고, 크지도 않은 시장에 대기업들이 다 들어왔고, 개발자들은 만날 야근에 시달리고... 무너진 생태계를 복원하고 해당 업계 종사자들이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은 천하의 빌 게이츠라도 선뜻 해보겠다고 나설만한 일이 아니다. 안철수가 괜히 빌 게이츠도 한국에선 SW사업 못한다고 외쳤을리 없다.

하면된다? 세상엔 해도 안되는 일이 많다는거,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정부 차원에서 SW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메시지가 나온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상황은 크게 변한게 없다. 그만큼 SW산업 정책은 표가 잘 안나는 험한(?)일이고, 이는 입이 갈라졌다는 정 원장의 말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사실 정경원 원장과의 인터뷰는 옛날 얘기좀 해가면서 덕담으로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힘들죠?' 한마디에 분위기는 '진지모드'로 급반전됐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인데,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3개 기관이 통합된 조직을 맡다보니, 내부 통합으로 바빴겠어요. 시행착오들도 많았을 것 같고. 감은 좀 잡으셨습니까?

통합전에도 각각의 기관들이 모두 IT업무를 담당했으니 업무 연속성을 확보하는데는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공공기관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조직이나 인사 문화 등을 융합하는게 쉽지는 않아요. 화학적 통합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공공기관 선진화로 인해 민간기업들처럼 통합에 따른 구조조정도 있었고요. 단장하다 팀장하고, 팀장하다 팀원이된 직원들은 서운한 마음이 들 수도 있었을거에요.

-진행형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조직을 통합하면서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취임과 함께 직원들에게 '조직의 주인은 바로 당신들'이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아쉬움이 많겠지만 공공기관으로서 자부심과 주인의식을 가져달라는 겁니다. 정부나 업계 그리고 학계를 고객처럼 생각해달라고도 주문했습니다.'

정부쪽 인사가 '고객'을 강조하는 장면은 다소 불편하게 비춰진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냄새가 풍겨서일 것이다. 진심이든 아니든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너도나도 국민을 노래하는 시절이다. 그러나 정 원장은 내놓고 고객을 강조했다. 그에게 고객은 돈을 벌어주는 소비자가 아니다. 만족감을 줘야할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고객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이유가 있습니까?

NIPA는 법률에 의해 설립된 기관입니다. 학계, 업계, 언론계, 일반 국민 등이 모두 고객들이에요. 고객이 살맛나야 조직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죠. 그런만큼 고객 만족은 중요하다고봐요. 공공기관에서 고객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어색할수도 있지만 나쁘게만 보지 말아줬으면 해요.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봐도 고객을 강조하는 분들이 나오거든요. 조선시대에도 목민관들은 고객이란 개념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NIPA 직원들의 생각들도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부 산하기관이 하는 역할이 애매하다는 얘기도 많습니다. 주무부처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만 다닌다는 지적도 오래전부터 나왔고요.

산하기관이 앞장설 수는 없죠. NIPA는 축구로 치면 어시스트를 해주는 미드필더에 가깝고 인터넷에 비유하면 링크로 볼 수 있습니다. 축구에선 골잡이가 골을 많이 넣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골잡이만 있으면 축구가 되겠습니까? 공을 배급해주는 미드필더도 중요해요. 산하기관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봐야죠.

-NIPA의 주요 업무중 하나가 SW산업 육성인데, 이게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만 먹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건데, 어떻게 보십니까?

지난해 우리나라 IT수출 '빅3'는 반도체, LCD, 휴대폰이었어요. 모두가 80년대 중반에 산업 육성에 들어갔고, 세계 정상권에 진입했습니다. SW도 비슷하게 시작했는데, 결과는 딴판이죠. 해외 시장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잖아요? 그렇다고 국내 시장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2000년대초만 해도 컴퓨터학과 정원이 10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30~70명 사이에요. 학생들이 안가는거에요. 비전이 없으니까. SW는 3D가 아니라 4D라는 말도 있잖아요? 위험하고 더럽고, 힘들고에 꿈이없는(드림리스: Dreamless)이 하나 더 붙은거죠.

-어제 오늘의 얘기도 아니고, 실질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을까요?

생태계가 계속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시장이 없다 보니, 기업들은 매출이 고만고만하고 그러다보니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투자할 수가 없어요. 그마나 있는 직원들은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사람들이 SW업계에 들어오겠어요? 바꿔야죠.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생태계를 선순환 구조로 돌려놔야 해요. 시장 발굴을 하지 못하는 SW기업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먹거리를 어떻게 만들어주느냐가 중요하다고 봐요. 융합 모델을 발굴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들의 해외 시장 진출 지원을 강화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NIPA가 올해 추진하는 정책의 핵심은 융합 산업 육성과 SW생태계 복원이다. 융합은 신규 시장 창출에, 생태계 육성은 중소SW벤처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구조적인 모순을 푸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공공부문 입찰에서 대기업 참여 제한 제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은 최근 대형 SI업체들이 연구개발은 하지 않고 대기업 전산실 노릇만 하면서 중소 업체가 개발한 SW를 전부 공짜로 달라고 해 (중소 업체는) 3D 업종이 됐다면서 공공부문에서 발주하는 소프트웨어 입찰 제도를 바꿔 대기업들은 해외로 나가게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갑을관계 등 구조적 모순은 문제를 풀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도 많잖아요?

중소 SW업체들이 대기업 독점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해법을 내기가 사실 쉽지는 않죠. 그래도 풀 수 있는 것부터 풀어야 합니다. 우선은 SW기업들을 위한 제도적인 부분을 강화할 겁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생 문화 정착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요. 인프라 구축도 중요합니다. 인프라란게, 사람이 핵심입니다. 우수한 인재들을 어떻게 SW업계로 끌어들일 것인가가 관건이에요. 거품으로 끝났지만 90년대말 벤처 열풍이 불었을때 얼마나 많은 우수 인력들이 들어왔습니까? 그때는 비전이 있었거든요. 이를 위해 IT산업의 메가트렌드 작업 수립 작업을 진행중입니다.

-메가트렌드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방향은 무엇입니까?

IT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핵심이에요. IT시장이 2005년 이후 성장률이 한자리수로 떨어졌어요. 그러면서 성장 한계론이 대두됐는데, 개인적으론 동의하지 않습니다. IT의 역할은 계속 확대될 겁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역할이 늘어나고 산업간 융합의 인프라로서도 IT는 계속 중요하게 다뤄질거에요. 그런만큼 메가트렌드 작업을 통해 IT로 인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흘러나갈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합니다. IT업계에는 또 하나의 먹을거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홍시 대신 떪은 감을 고를줄 알아야 한다

정경원 원장은 제주도 출신이다. 고등학교까지 바람부는 제주에서 살았던 토박이다. 시골 출신 청년들이 으레 그랬던 고시에 패스해 가문을 일으키겠다식의 의무감은 없었단다. 그저 역사 선생님이 되기를 희망했을 뿐이다. 그러나 공무원이 될 운명이었는지 들어간게 법학과였고 대학 재학시절 23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체신부와 정보통신부 요직을 거쳐 정부 산하기관장이 됐다.

그는 기자들 사이에선 '외유내강형'으로 분류된다. 외모는 옆집 아저씨 또는 할아버지 같지만 일에 있어서 만큼은 대단한 원칙주의자다. 그는 '원칙'보다는 '기본'이라는 말을 즐겨쓰는데, 기본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단다. 기본만 지켜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는데, 그러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다는 것이다. 그가 '백투더베이직'(Bact to the basic)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홍시 대신 떪은감을 골라야 한다'는 문구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다닌다. 다른 사람한테 들은말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단다. 돈과 관련해서는 다소 무덤덤한 스타일이다. 그는 주택조합으로 들어간 등촌동 아파트에서 91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바빠서 그랬는지, 재테크 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한군데서 정말 오래도 산다.

-오랫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원칙이나 가치관같은게 생겼을텐데요.

기본을 지키자에요. 몇년전 충청체신청장에 부임했을때 제가 비교적 나이가 어린 편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직원들 사이에서 '이제 죽었다'는 얘기가 돌더라고요. 뭔가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긴장한거죠. 그때 과장들과 회의를 하면서 기본을 지키자고 했더니 금방 긴장이 풀어지는 겁니다. 별거 아니구나 하는거에요. 기본이라는 말을 가볍게 생각한거죠.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래서 좀 세게 나갔어요. 우체국 업무가 복잡하다보니 매뉴얼이 있고 그대로 하면 사고 안납니다. 이게 기본이라고 했어요. 얼굴에 힘좀 주고 할것 하고 하지말아야될 것은 하지말라고 강하게 주문했죠. 그랬더니 긴장좀 하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기본외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배려라고 해야할까요. 충청체신청장할때였어요. 우정사업본부에서 체신노동조합 지방 위원장하던 분이 있었는데 반평생을 노동조합에서 살았죠. 이 양반이 지방위원장을 4선인가, 5선을 했는데, 궁금해지더라고요. 만났을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비결을 물어봤더니 충청도 특유의 억양으로 떫은 감과 홍시가 있을때 '지는 떫은 감 잡았지 홍시 안잡았슈'하더라고요. 자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한다는 거죠. 당연하게 들렸을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슴에 정말 와닿았어요. 그때부터 사람들 만날때 홍시 얘기를 자주합니다.

-공직자로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분이 있었나요?

업무측면에서는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 기본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에요. 혼도 참 많이 났습니다. 정 차관님이 구의동 전산센터 소장하고 있을때 제가 그밑에 과장으로 들어갔을때에요. 보자마자 잘왔어 하더니 기계실 들어가서 파워 켜고 끄는 것부터 배우라고 해요. 이랫사람 통제하려면 기본부터 알아야 한다고. 진짜 철저하더구만... 매뉴얼 갖다줘도 그냥 사인 절대 안해줬습니다. 직접 써보고 문제 없으면 해주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분이 사람이 키울만 하다 싶으면 엄청 혼내고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존댓말 씁니다. 아랫사람인데도 말을 높여줘요. 정말 그랬습니다.

-아이디어는 주로 어떻게 구하는 편이십니까?

아까 링크 얘기를 했지만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겠더라고요. 지난해 11월, 12월에는 일주일에 조찬 3건 정도를 다녔고 저녁때도 매일 사람들 만났어요. 우정사업본부장할때는 직원들과의 자리도 많이 가졌던 편이고요. 인터넷도 많이 활용합니다. 각종 경제연구소에 가보면 인터넷 강국을 실감할때가 많아요. 올라와있는 정보들을 다 소화하기가 힘들 정도죠.

-외유내강형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리는데, 스스로 평가했을때 본인이 가진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솔선수범과 친화라고 해야할까요? 약속없으면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밥도 많이 먹고 그래요. 비싼거 안사줘서 오히려 직원들은 불만인가?(웃음) 인재를 뽑을때도 사람 됨됨이를 중요하게 보는 편이에요. 됨됨이만 있으면 실력은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제 경험상 그랬어요.

-책읽을 시간은 있으세요?

역사 등 이쪽저쪽 책을 많이 보고 싶은데, 쉽지는 않네요. 가방에 항상 책을 넣고 다니는데, 잘때도 많아요.(웃음) 요새 보는것은 체신부 기관지 편집장했던 분이 정리한 CDMA 휴대폰 개발 비사, 퀀텀점프라는 책이에요. 옛날에 일어났던 일들인데, 다시 읽어보니 귀감으로 삼을만한 내용이 많더라고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오합지졸 연주단원들이 가진 잠재력을 흔들어깨워 아름다운 화음을 이끌어낸 최고의 지휘자였다. 강마에가 주도한 좌충우돌 스토리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그라운드의 마에스트로'란 찬사를 받았던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은퇴하는 그날까지 절묘한 패스로 골잡이를 능가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지단이 찔러주는 감각적인 어시스트로 인해 프랑스 대표팀은 '아트사커'로 불리었다.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정경원 원장과 얘기를 하다보니 문득 강마에와 지네딘 지단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 원장이 강마에나 지단같다는 용비어천가를 불러주려고?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싶다. 정 원장 역시 마에스트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강마에와 지단이 머리를 스쳐간 것이다. 강마에는 드라마 주인공일 뿐이고, 지단같은 축구선수는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인데...

정경원 원장이 이를 모를리 없다. SW산업 생태계 복원이라는게, 말은 그럴듯 해도 쉽지 않을 것임을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마에스트로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다. 그게 임무다. 그래서다. 그가 소신으로 삼고 있는 '기본'을 계속 강조해주기를 바란다. 기본만 지켜도 사는데 지장없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SW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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