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맨해튼 프로젝트 -원자폭탄을 만들다

일반입력 :2009/11/26 10:59    수정: 2013/02/19 18:17

이재구 기자

[이재구코너]맨해튼 프로젝트 -원자폭탄을 만들다

인류최초의 핵전쟁 프로젝트(1942년 12월 2일):

페르미 ‘시카고파일-1’ 원자로 가동

■독일, 하이젠베르그 앞세워 개발착수

1939년 7월, 헝가리에서 망명한 유태인 물리학자 레오 질러드는 친구 아인슈타인에게 방문의사를 전했다. 독일

의 핵폭탄개발 저지를 위한 도움을 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라늄 핵분열 현상이 페르미에 의해 확인되고, 오스트리아 여성 과학자 마이트너에 의해 확인된 지 6개월. 미국의 언론들은 원자에너지 발견의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하지만 대다수 미국 물리학자들은 원자핵에너지나 원자폭탄 실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어떠한 공식적인 원자에너지 프로젝트도 미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세계최대의 군비국가로 부상한 독일은 엄청난 수의 우수한 기술자와 유대인을 축출했음에도 여전히 우수한 대학연구진을 보유한 세계 최고의 과학국가였다.

헝가리에서 망명한 물리학자 질러드는 독일의 원자핵폭탄 개발 가능성은 물론 나아가 핵개발 능력에서 미국에 비할 바 없이 앞서가고 있다고 믿었다.

이미 독일은 점령지 체코 광산에서 나오는 핵폭탄재료인 우라늄광석의 반출을 금하고 있었다. 여지없는 핵폭탄 개발의 증거였다.

실제로 나찌 독일은 아인슈타인 이래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라는 하이젠베르그를 통해 원폭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질러드 편지’

1938년 12월 10일 ‘중성자에 의해 방사원소의 시연’을 골자로 하는 논문으로 스웨덴 구스타프국왕으로부터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페르미는 수상 직후 즉각 미국으로 망명했다. 뭇솔리니가 발표한 반유태인 정책은 그와는 무관했지만 아내 로라는 유태인이었다. 독일 일본과 함께 추축국을 형성한 고국 이태리는 잊어야 했다.

질러드는 미국으로 귀화한 핵분열의 발견자 페르미에게 실험을 지속할 방법을 제안했다. 나찌 독일이 이미 핵폭탄을 개발 중인데 영국 정부에 말해도 소용없었지 않았던가.

이듬해 7월12일 경. 질러드는 뉴욕 롱아일랜드 북쪽에서 보트휴가 중이던 아인슈타인에게 한통의 편지를 건넨다. 내용은 그 자신이 쓴 것으로 루스벨트대통령에게 독일의 핵 위협을 알리고 미국의 핵폭탄 개발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질러드의 편지에 아인슈타인의 사인이 더해졌다.

“···이제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이뤄지리라는 게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폭탄의 제조도 가능하게 할 것이며 따라서 다소 불확실하긴 하지만 매우 강력한 새로운 형태의 폭탄이 만들어질 것이란 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10월2일자로 작성된 이른바 ‘아인슈타인-질러드 편지’는 9일 후에야 루스벨트의 고문인 경제학자 알렉산더 삭스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해진다.

대통령느 우라늄위원회 구성을 명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신세계에 도착했다.”

미육군 과학개발연구청(OSRD) 지휘로 수행된 맨해튼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는 버클리대에 적을 둔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였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서 실험을 주도한 인물은 엔리코 페르미였다. 1934년 로마에서 중성자 생성장치를 만들어 연구하던 그가 이제 미국에서 역사를 창조하려 하고 있었다.

1942년 12월 2일 시카고대학 풋볼구장 한구석 스쿼시연습장에 세워진 실험실에서 전화소리가 들려왔다.

“이태리 항해사(페르미)가 신세계에 도착(원자로 가동에 성공)했다.”

“주민들은 어떤가?”

“매우 호의적이다.”

연구 참여자였던 콤프턴과 워싱턴D.C.에 있던 하버드대 총장 코넌트 간에는 이처럼암호같은 전화내용이 오갔다. .

‘시카고 파일-1(Chicago Pile-1)’이란 이름의 핵원자로가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세계최초로 성공적인 연쇄반응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핵 분열 속도를 자극하는 원자폭탄의 방아쇠인 중성자로 우라늄235의 원자핵을 격발시키면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

우라늄 핵 폭탄은 1%도 안되는 내부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때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설계된 물체 내부의 질량은 원자폭탄으로 만들어져 저 무서운 죽음의 오렌지색 섬광으로 바뀐 후 태평양 건너에서 두 도시를 집어 삼킬 것이었다.

■인류를 향해 분출된 왜곡된 에너지 1945년 5월 초 독일의 항복을 받은 트루먼 대통령 앞에는 4가지 방안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일본 천왕제를 인정하는 평화적 해결방법, 일본 봉쇄, 일본열도 침공, 원자폭탄 투하 등이 그것이었다.

대통령 임시위원회의 문서가 강경주의자 트루먼의 입장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1945년 6월 1일 번스장관이 추천하고 위원회가 동의한 바에 따르면 가능한 한 빨리 일본에 폭탄이 투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D데이 이전인 7월 16일. 미국은 뉴멕시코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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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발의 뇌관인 중성자의 기하급수적 방출과정이 100만분의 1초 만에 끝난데 이어 1000분의 1초 만에 폭발한 원자탄은 세찬 소용돌이로 지상을 할퀴어 놓았다. 공중에는 버섯구름이 떠올랐다. 8월 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카사키에서도 이 과정은 그대로 재현됐다.

아인슈타인이 알아 낸 E=mc²(에너지=질량X빛의 제곱)라는 정교한 우주에너지의 원리는 불행히도 페르미가 발견한 핵분열 현상을 응용한 전쟁무기를 통해 그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