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인텔 4004 탄생

일반입력 :2009/11/12 10:53    수정: 2011/05/16 08:42

이재구 기자

[이재구코너]인텔 4004 탄생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1971년 11월15일, 집적화된 전자제품시대 예고하다

계산기 전쟁에 뛰어든 비지컴의 칩설계 주문

“10만달러에 탁상용 계산기 칩을 만들어 주시오.”

1969년 4월28일. 일본의 한 전자회사가 미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소재 신생 반도체 업체 인텔을 방문했다. 자사의 새로운 계산기(비지콤 141-PF)에 들어갈 칩 9종류의 제작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주문업체는 니폰캘큐레이팅머신(후일 비지콤)이란 회사였고 인텔은 설립한 지 1년여에 불과한 신생기업이었다.

64년 동경올림픽 이래 높아진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입지를 키워가던 일본업체들 간에 한창 탁상용 계산기 경쟁이 불붙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여러가지 부품기능을 하나의 반도체에 넣고 싶어했다. 그렇게 되면 전자계산기는 물론 전자금전등록기,현금자동계산기의 제품 크기를 줄이면서 안정성을 높여줄 것이고 가격도 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4년전 텍사스인스투루먼트(TI)의 IC개발자 잭킬비가 반도체를 활용한 계산기를 내놓으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반도체의 장점과 진공관의 약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샤프나 카시오같은 일본의 선발업체가 소형화를 위한 새로운 IC를 구하기 위해 미국업체들과 제휴를 추진하는 마당이었다. 미국의 반도체기업들도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1000달러대의 각종 계산기에 들어가는 칩 시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인텔과 계약한 비지컴은 계약당시 자신들과 이미 계약관계를 가진 또다른 회사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비지컴은 인텔이 설계한 칩을 NCR재팬에 주문자상표 부착생산(OEM)방식으로 공급할 계산기에 사용할 심산이었다. 당시 NCR은 미국의 컴퓨터거인 IBM과 함께 슈퍼마켓에서 널리 사용되는 금전등록기시장의 강자였다.

인텔은 1103이란 1kD램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메모리반도체 전문회사였다. IC발명자인 밥 노이스의 명성이 이미 실리콘밸리에 널리 퍼져 있어 페어차일드 등으로부터의 인력충원에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매출이 오르지 않았고 주력 메모리의 판매가 늘 때까지 주문형반도체(custom IC)제작을 해 주면서 매출증대를 노리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일본 비지컴으로부터 칩을 설계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최초의 CPU로 기록될 ‘4004’탄생 스토리의 시작이기도 했다.

깨진 CPU개발 약속

1970년 4월 7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막 도착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인텔 본사에 도착한 네사람의 대화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CPU로직설계도는 어디 있지요?”

본사에 도착해 인텔 측이 내놓은 설계도를 본 젊은 일본인 엔지니어가 묻자 인텔 측 로직 설계 엔지니어 페데리코 파긴Federico Gaggin이 대꾸했다.

“무슨 소리요, 난 엊그제 이 회사에 온 사람이란 말이오.”

“너무 합니다. 이건 아이디어일 뿐이지 않습니까? 이건 아니란 말이오. 이젠 늦어버렸습니다. 당신들 정말 나쁘군요.”

동양에서 건너온 낯선 젊은이는 초면인 이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꼭 나흘 전인 4월 3일 인텔에 합류한 파긴은 영문도 모르는 채 봉변을 당하고 서 있어야 했다.

비지컴의 젊은 일본인 엔지니어 시마 마사토시(嶋 正利)가 태평양을 건너 온 이유는 계약에 따라 완성된 칩 설계도를 검수하기 위해서였다. 예정대로라면 7월까지는 칩 생산을 마쳐야 했다. 그러나 막상 와 보니 1년 전 계약한 칩 설계 프로젝트는 10개월 전 그대로였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테드 호프 Ted Hoff연구원은 10개월전 시마에게 주문받은 디자인 컨셉트를 제시한 인물이었지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웬일인지 비지컴의 믿음과 달리 인텔의 작업은 지지 부진했다. 사실 당시 인텔의 로직 설계실력은 서툴렀다. 엔지니어도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을 맡을 만한 개발자라고 해야 테드 호프 정도였는데 그는 인텔의 주력인 다른 메모리 설계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인텔은 70년말까지 약 150명의 운영직원과 20명의 연구원을 거느리고 있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텔이 잘나가는 1103메모리 칩 대신에 마이크로프로세서 MicroProcessor를 만들기 위해 힘을 뺀다는 것은 낭비인지도 몰랐다.

인텔은 1103이란 1kD램 메모리를 세계최초로 개발해 메인프레임이나 미니컴퓨터 등 중대형 컴퓨터 제조업체에 주력제품으로 잘 팔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자기저항소자MagneticCore Meomory를 대체하는 부품으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메모리칩은 데이터저장을 위해 엄청난 양의 구리선과 전선을 필요로 하는 자기저항소자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지컴과의 계약은 어디까지나 계약이었다..

험난했던 2진법 4비트 프로세서 개발의 여정

“이것보다는 더 단순화시킨 아키텍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1969년 6월. 34살의 스탠포드박사 테드 호프는 2달만에 비지컴에서 날아온 칩 설계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작업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비용맞추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것은 10진법을 사용하는 칩 설계도로서, 너무 복잡한데다 계산기 모델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새로운 칩을 생산해 내야 하는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밥 노이스가 그에게 일처리를 맡겼다.

“좋아, 자네...이 디자인을 단순화할 수 있다면 해 보라고.”

8월말 테드 호프가 비지컴의 엔지니어가 머물고 있는 숙소 미들필드 365번지를 찾았다.

“시마상, 10진법대신 2진법 연산방식을 쓰고 4비트 프로세서로 만드는 것이 좋겠네.”

테드 호프가 홍조를 띠고 흥분해서 말하자 시마도 동의했다. 이 제안은 칩개발계획 전체를 원점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의미였다. 그러나 한달 만에 비지컴 본사가 이에 동의해 왔다.

이제 이 칩은 당초 구상한 비지컴의 계산기용 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전자제품에도 적용할 수 있는 범용 칩이 될 것이었다.

인텔은 시마 일행이 일본으로 구국한 후 2달이 지나서야 최종 칩규격을 결정했다. 하지만 해를 넘긴 1970년 4월까지도 칩설계는 그 자리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도 인텔 내부에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인텔이 페데리코 파긴을 영입하고서야 비로소 1년간 공중에 떠있던 비지컴계산기용 칩으로 시작된 인텔4004칩의 개발프로젝트가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비지컴측의 벼락같은 질타가 있은 지 얼마 안돼 파긴에게 개발 책임이 맡겨졌다.

“시마상, 시간이 촉박하니까 당신이 도와주면 좋겠는데....”

파긴의 부탁으로 시마까지 합류했지만 서두른다 해도 칩은 연말이나 돼야 나올 것이었다.

약 2000개의 로직을 설계해야 했다. 이는 당시 로직기술이 없었던 인텔로선 엄청난 작업이자 모험이었다.

“4001,4002,4003, 그리고 4004를 만든다.”

팀장 페데리코 파긴이 결정을 내렸다. 4001은 읽기전용 메모리(ROM),4002는 랩(RAM),4003이 저항기, 그리고 4004가 CPU였다.

당시 인텔은 제품번호 1000번대를 D램에, 2000번대를 스태틱 램에 할당하고 있었다. 비지컴에서 주문한 신형 칩은 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이므로 4000번대 번호가 할당됐다.

페데리코 파긴 개발팀장은 이 네가지 칩을 1년내에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인텔개발자의 통상 칩 개발속도는 연간 1개였다.

팀장 페데리코 파긴을 비롯해 테드 호프, 스탠 메이저, 그리고 시마 마사토시까지합류한 개발자들은 MCS-4(Micro Computer System 4-bit))라는 이름으로 4개의 칩을 설계에 나서게 된다.

1970년 크리스마트 다음날 퇴근 시간인 오후 6시. 파긴은 웨이퍼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공장으로 달려갔다.

“아, 어쩜 내가 이렇게 엉터리로 설계할 수 있지?”

다음날 새벽4시까지 칩을 테스트하던 파긴은 50%의 성공률에 실망했다. 일본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시마를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다급해져갔다.

이듬해 1971년 1월 중순. 드디어 2238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된 인텔 4004가 만들어졌다. 인텔4004는 길이가 6분의 1인치, 너비가 8분의 1인치의 작은 칩에 담겨진 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3월에 수정 완성된 칩이 비지컴으로 보내졌고 열흘 후 테스트 합격이라는 통지가 왔다. 이제 비지컴의 탁상용 계산기는 4004를 포함한 4개의 칩 시리즈, 즉 MCS-4로 구성돼 팔리는 일만 남았다.

칩설계비용을 깎아주고 지재권을 확보하다

“칩가격을 낮춰주고 대신 제품 공급권을 우리에게로 가져 와야 합니다.”

1971년 5월 밥 노이스 사장이 비지컴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려 하자 4004개발팀장 파긴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이미 4004가 전자기기에 적용되면서 이어질 폭발적 파괴력과 시장 성장 가능성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4004계약 내용에는 비지컴이 개발성과에 대한 소유권을 갖도록 돼 있었다.

이런 가운데 파긴은 시마로부터 비지컴의 재정적 어려움을 전해 들었다.

인텔의 칩 개발이 늦어진 1년 새 일본 탁상용계산기 시장 상황이 급변해 제품가격도 곤두박질 쳐 버린 것이었다.

지난 4월 미국 TI의 잭 킬비가 칩 소형화 노력을 반영한 세계최초의 휴대용 계산기 포켓트로닉Pocketrinic을 내놓았다. 1kg이 넘는 큰 사이즈에다가 덧셈,뺄셈, 곱셈, 나눗셈 등 4칙연산 기능 밖에 없었지만 가격은 150달러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비지컴 등 일본 계산기업체들의 탁상용계산기는 1천달러나 했다. 경쟁이 안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만일 비지컴의 양보를 얻지 못하면 인텔이 칩을 다른 회사에 팔 수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셔야 합니다.”

두 회사 간 최초의 계약서를 살펴본 테드 호프는 밥 노이스가 마케팅팀과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노이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칼자루를 쥐고 있지만 이 칩을 제품으로 발표하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네.”

마케팅부서도 반대 입장이었다. 컴퓨터회사가 1년에 2만대의 미니컴퓨터를 팔고 있는 마당에 시장진출도 늦은 인텔의 CPU판매는 고작 2천개에 그칠 것이란 전망 때문이었다. 머리를 썩이면서 2천개의 CPU지원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당시에 오늘날 같은 거대한 PC시장의 등장과 함께 엄청난 규모의 수요가 발생히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텔 내부에서 찬반 격론이 벌어졌다.

가장 큰 반대 이유는 인텔의 주력 제품인 1103메모리의 주 고객사 기반이 거대한 중대형 컴퓨터 회사에 있다는 것이었다. 인텔이 4004를 생산하면 그들에게 경쟁사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왔다. 메모리 수요처를 경쟁사에게 빠앗기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4004칩 지재권 확보에 몸달았던 테드 호프의 걱정거리는 ‘엄청난 4004물량을 공급하고 나서 예상보다 낮은 칩 성능이 고객을 실망시키지나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밥, 우리가 이 결정을 지연시킬 때마다 우리는 이를 발표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테드 호프가 노이스의 결단을 재촉하고 했다.

행운의 여신은 인텔의 편이었다. 1971년 6월. 마침 비지컴이 인텔에게 최초의 약속한 가격에 물건을 사기 어렵다면서 칩가격을 낮춰달라고 통보해 왔다.

인텔은 4004공급가를 4만달러나 깎아주는 대신 4004칩을 비지컴 계산기용 이외의 용도로 팔 수 있는 권리, 즉 지적재산권(지재권)을 요구했다. 비지컴은 이에 동의했다.

4004는 그 범용성을 바탕으로 계산기는 물론 모든 전자기기에 지능을 더해 줄 원천이 될 보물이었지만 당시 비지컴 내에서는 아무도 그 가능성을 읽지 못한 것이었

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인텔에게 돌아갔다.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시대를 열다

‘집적화된 전자제품의 새시대가 도래했다.(Announcing a New Era of integrated Eectronics.)’

1971년 11월 15일 일렉트로닉스뉴스(Electronics News)에 이같은 제목의 광고가 떴다.

일러스트로 된 칩 광고의 중앙에서 컴퓨터단말기를 이용하고 있는 여성 앞으로는 캐비넷 만한 미니컴퓨터 4대가 서있었다. 컴퓨터는 좌우로 지네발(리드프레임)이 붙은 마이크로프로세서 형상을 띠고 있었다. 칩 안에 컴퓨터가 들어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오른쪽 광고문안의 설명은 ‘칩 안에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소형 컴퓨터가 들어있다(A Micro-rogrammable computer on chip!)’였다.세계최초의 CPU인 인텔 4004(미국특허 3,821,715)의 등장을 알리는 광고였다.

이 칩은 4비트로 한정된 초보적인 수준이라 초당 6만개의 계산까지만 처리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펜티엄2칩 6억개의 1만분의 1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4004가 일반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인텔의 움직임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인텔은 페이차일드조차도 시행하지 않은 기업공개(IPO)를 했고 주식의 3분의 1이상을 소유한 밥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최대 주주가 됐다. 초기 주식공모만으로도 그들은 최소한 1천만달러의 부를 거머 쥐었다.

1971년 당시 세계최고의 부자였던 석유재벌 폴 게티같은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정도의 부였다.

인텔의 주식가치는 1년도 안돼 같은 날 주식을 상장한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의 2배이상으로 뛰어 올랐다. 파이낸셜월드지는 “메모리칩이 여자의 가슴을 이겼다”고 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원한다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그로부터 1년후 인텔은 8008을 내놓았다. 이후 나오기 시작한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 껍데기를 제외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다. 게다가 컴퓨터는 물론 전자등록기,동전교환기,교통신호기,체중계,혈액분석기,칵테일혼합기,전자오븐레인지,자동차 등 모든 전자제품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게 됐다.4004는 반도체가 부품에서 시스템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지만 초기의 인텔판매는 부진했고 4004칩을 진정한 혁명으로 이끌기 시작한 인물은 1972년 당시 17세,19세 된 애송이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었다. 이들은 4004의 첫 번째 업데이트 버전인 8008을 이용해 시내의 차량 흐름을 조사하는 기계를 만들고 트랩오데이터(RTraff-O-Data)라는 회사를 설립해 칩을 활용함으로써 오늘날 이른바 ‘x86’계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해 주었다.

4004는 또 인텔에게 칩이상의 의미, 즉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한 구원투수 아이템으로서도 엄청난 계기를 마련해 준 힘의 원천이었다. 1985년 중반 일본 반도체 회사들의 저가 메모리칩 공세로 인텔이 위기를 맞았을 때 인텔을 구해낸 아이템이 4004에서 진화해 온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80286,82386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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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앤디 글로브는 “나는 그것이 인텔에게 미래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첫 15년간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실토해 일본 반도체 공세를 이겨낸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시작이었던 4004를 회고한 바 있다.

실제로 그랬다. 어느 누가 인텔과 비지컴간의 4만달러짜리 거래가 오늘날 연매출 400억달러(2010년)인 세계1위 반도체 회사 인텔의 밑거름이 되리라고는 생각했을까? 인텔의 매출은 당시 비지컴이 깎아 받은 금액의 100만배에 해당하는 액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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