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인터넷혁명'의 시작

접속의 시대를 열다

일반입력 :2009/10/29 10:48    수정: 2011/06/22 13:38

이재구 기자

[이재구코너]'인터넷혁명'의 시작-1969년 10월29일, UCLA-SRI 컴퓨터 통신 성공

최초의 기계(컴퓨터)간 통신메시지는 'Io'

“야호, 이거야! 이제 내가 뭘해야 할지 알겠군.” 1966년 6월 미항공우주국(NASA)출신의 한 과학자가 환호했다.

미국방부산하 고등연구계획청(ARPA)으로 옮겨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이트 연계문제에 골몰하던 밥 테일러국장이었다. 한 대의 컴퓨터로 사무실에 있는 어느 컴퓨터와도 양방향 컴퓨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생각은 전임 릭 라이더국장의 논문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헤르츠펠트 국장은 그의 브리핑을 들은 지 15분 만에 탄도미사일 예산 가운데 100만달러의 연구비 서류에 결재했다. 인터넷의 원형인 아파넷(ARPANET)구축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ARPA는 연구를 수행하는 13개 사이트의 컴퓨터를 공유하고자 했으나 용량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위험분산을 위해 입찰한 기업 가운데 보스턴에 있는 사업자 BBN이 만든 라우터기능을 하는 컴퓨터 IMP(Interface Message Processor)를 호스트컴퓨터에 연결, 초당 50k비트의 정보를 아파넷에 전송했다.1969년 10월29일 오후 9시. UCLA 학생 프로그래머 찰리 클라인과 레오너드 클라인록 교수에 의해 아파넷 최초의 메시지가 엥겔바트 휘하의 스탠포드대연구소(SRI) 호스트컴퓨터로 보내졌다.

이들은 한시간 여 동안의 노력 끝에 ’login'이란 메시지 전송에 성공한다.

메시지는 ‘login’이었다. ‘ㅣ’과 ‘o’는 문제없이 보내졌으나 그때 시스템이 엉켰다. 그래서 아파넷 최초의 메시지는 ‘Io'로 남게 됐다.

■스푸트니크 쇼크와 아파넷의 진실게임

“소련의 스푸트니크발사 쇼크가 인터넷(아파넷)기술의 등장을 이끌었다”는 얘기는 이제 웬만큼 과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처럼 회자된다.

두 사건 사이의 함수관계는 다음처럼 흥미롭게 전해진다.

1969년 미국방부는 소련의 핵공격으로 미사일기지가 파괴될 경우 즉각 효율적 반격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아파넷(ARPANET)통신망을 구축했다. 어쨌든 이 망은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인터넷으로 성장했다. 토머스 프리드먼도 저서 ‘코드그린’에서 이를 그대로 반영해 언급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전설적 스토리와 관련, 1964년 8월 미 방위산업체 RAND연구소의 폴 배런이 제출한 ‘분산통신에 관하여‘란 박사학위 논문 외에는 특별한 증거가 없다.

그는 “전화선에 의존하는 미군통신체계로는 유사시 미 전역에 흩어진 미사일기지에 발사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전화선에 의존하던 미군의 통신명령전달체계의 신뢰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었다.

중앙집중식 전화선은 공격을 받으면 네크워크 불통사태를 야기시킬 위험성이 높다는 지적이기도 했다.

이것이 스푸트니크와 아파넷개발의 함수관계로 흥미있게 포장된 과정에 대한 설득력있는 분석이다.

테일러국장은 특히 지난 1999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인터넷탄생 30주년 기념인터뷰를 통해 앞서의 사실을 밝힌 바 있다.

패킷통신이 확실한 데이터 보장.

미 국방부의 아파넷은 비싼 컴퓨터를 사용하던 당시 사이트의 네트워크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설계된 것이었다.

스위칭노드와 링크가 핵공격이 없더라도 미군의 전화통신선은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폴 배런은 통신망을 그물모양으로 분산시킴으로써 기존 전화망(서킷망)을 이용한 통신네트워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해법까지 제시했다. 즉, 한곳에서 신호가 막히면 다른 곳으로 돌아 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침 우연히도 디지털패킷스위칭기술이 동시다발적으로 연구되고 있었다. 영국 국가물리학연구소(NPL)의 도널드 데이비스가 68년 8월 이 패킷통신을 처음 시연하는데 성공했다. 패킷통신이란 사람 목소리나 데이터를 여러 토막으로 나눠 보내고 최종 목적지에서 이를 원래대로 재조합해 인식하는, 당시로선 최신 개념이었다.

이로써 데이터 전송이 안전해졌다.레오너드 클라인록역시 사람달의 패킷통신의 불가능을 얘기할 때 박사학위논문을 통해 이를 증명한 인물이었다.

아파넷은 소련의 핵공격시 즉각 반격하기 위한 네크워크 구축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실제로 당시 APRA청장이었던 찰스 허츠펠드도 “제한된 컴퓨터자원이 아파넷을 만드는 것을 가속화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인터넷 세상이 접속의 시대를 이끌다.

1970년 3월 아파넷은 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던 MIT출신의 벤처기업 BBN에 의해 미동부까지 연결된다.

1973년 9월에는 2개의 인공위성 연계를 통해 태평양, 대서양을 거쳐 하와이와 노르웨이까지 네트워크에 연결됐다. 노르웨이에서 런던까지 연결되면서 비로소 글로벌 인터넷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1983년 미 국방부는 아파넷에서 밀넷(milnet)을 분리했다.

유럽핵물리학연구소(CERN)은 1989년까지 이 아파넷과의 연계를 거부하다가 결국 연계시키기에 이른다. 1984년 '인터넷의 배관공'이란 별명을 얻는 시스코가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화려하게 부상한다.

인류는 1969년 7월20일 인류가 달에 착륙하면서 지구밖 우주탐사 분야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석달여가 지난 10월29일. 인터넷 혁명의 씨는 아주 조용하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온 지구촌을 뒤집어 놓을 만큼 거대한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리한 눈으로 보여준 것처럼 인류는 더 이상 물체를 소유하는 방식의 삶만으로 살 수 없게 됐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인터넷증권,서점,음악,게임,경매,상거래 등 온갖 인터넷비즈니스가 우리 삶을 바꿔놓고 있다. 그 인터넷을 잘 이용한 아마존, 야후,구글,애플,시스코 같은 글로벌 IT기업들은 지금 돈방석에 앉아서 전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은 바야흐로 클라우드 컴퓨팅 은하계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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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등장 40주년을 맞아 지난 13일 우리나라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미래 인터넷 프로젝트인 'GENI'의 국제 공동연구 파트너로 최종 선정됐다.

향후 3년간 미국 BBN(GENI 과제 총괄기관), 유타대학, 인디애나대학 등과 함께 공동으로 미래 인터넷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는 낭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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