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기술을 이끈다는 것

[문화엔진: 본질을 읽는 시선] 문화기술 얼라이언스 출범, 현장의 난제를 R&D 성과로 잇는 조건

전문가 칼럼입력 :2026/10/16 10:15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문화엔진’은 문화정책과 콘텐츠산업, 도시공간과 예술 현장의 흐름을 깊고 넓게 통찰하기 위해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콘텐츠 디렉터 이창근과 현대미술가 최지원, 도시경관 계획가 박상희, 미디어공학자 정지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각자의 전문 영역과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디넷코리아 문화산업팀 기자들과 협업해 연재를 이어갑니다. ‘문화엔진’이 K-컬처를 미래산업의 엔진이자 동시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10월 15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제1기 문화기술 얼라이언스 출범식에서 스토리 원천 콘텐츠 분야 소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영상과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사라진 풍경을 재현하고 상상 속 장면을 화면으로 옮기는 일도 한결 쉬워졌다. 그러나 기술이 표현의 가능성을 넓힌다고 해서 무엇을 만들고 왜 보여줘야 하는지까지 대신 판단해주지는 않는다. 문화기술(CT)이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기술의 성능보다 그것이 필요한 현장이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 엘리에나호텔 컨벤션홀에서 제1기 문화기술 얼라이언스가 출범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 부설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이 마련한 협의체로, 기업인과 창작자, 학계 및 연구기관 등 190개 기관의 전문가 214명이 참여한다. 게임·인터랙티브, 영상·미디어, 음악·공연, 스토리 원천 등 네 분야에서 기술수요를 발굴하고, 이를 중장기 투자전략과 2028년 신규 연구개발(R&D) 사업기획으로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5일 제1기 문화기술 얼라이언스 출범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출범식에서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문화현장의 수요와 창작자의 상상력이 기술개발의 방향을 이끌어야 한다는 취지를 강조했다. 이른바 '문화 주도형 AI'다. 김명하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장은 개회사에서 현장의 기술개발 아이디어가 분야 간 충분한 논의로 이어지지 못하거나, 보다 큰 연구개발 전략으로 발전하기까지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얼라이언스는 이러한 현장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협력체계다. 올해 출범한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이 문화체육관광 분야의 R&D 기획·관리·평가 기능을 연계하는 만큼, 중요한 것은 현장의 요구를 구체적인 연구개발 과제로 발전시키고 실제 산업의 성과로 연결하는 일이다.

장소와 매체마다 다른 창작의 문법

문화콘텐츠 현장에서 기술의 필요는 장소와 매체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가 디렉터로 참여한 구 송도역사 복원사업에서는 근현대 철도유산의 기억을 전시와 실감콘텐츠, 공간경험으로 연결했다. 사라진 역의 시간을 오늘의 방문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하게 할 것인지가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영상기술을 선택하기 전에 장소에 축적된 역사와 기억을 읽고, 이를 어떤 이야기와 관람경험으로 풀어낼지 판단해야 했다.

올해 컬렉션 감독으로 참여한 조선왕실 디지털 컬렉션은 디지털 회화·영상·이미지 등 21점의 작품을 스마트TV 미술 감상 서비스로 선보인 작업이었다. 역사적 장소를 직접 방문해 경험하는 콘텐츠와 일상의 화면에서 감상하는 디지털 작품은 관람환경부터 다르다. 문화자원의 원천가치를 어떤 시각적 형식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매체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할 것인지가 중요한 기획의 문제였다.

두 사례는 모두 문화유산의 가치를 디지털콘텐츠로 확장했지만 창작의 조건은 달랐다. 하나는 장소에 축적된 기억을 현장에서 경험하도록 설계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자원을 새로운 감상환경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장소와 매체가 달라지면 창작의 문법도 달라진다. 기술을 먼저 선택하기보다 문화자원의 가치를 읽고, 전달할 경험을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제작 효율을 넘어 신뢰성과 지속활용으로

이러한 차이는 문화기술 R&D가 풀어야 할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AI를 활용한 역사문화 콘텐츠에서는 생성된 이미지가 어떤 원천자료에 근거하는지, 사실의 재현과 창작적 해석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는 영상이 역사적 정확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의 활용과 출처 확인, 원천자료의 권리관리를 지원하는 기술적 환경이 필요하다. 다만 역사적 해석의 타당성과 창작의 책임까지 기술에 맡길 수는 없다.

제작 이후의 활용도 살펴야 한다. 하나의 영상콘텐츠를 전시관 미디어월과 야외 미디어파사드, 디지털 감상 플랫폼에 적용하려면 화면의 비율뿐 아니라 설치환경과 관람방식에 따라 재구성이 필요할 수 있다. 상설 문화공간에서는 콘텐츠의 갱신과 유지관리, 운영비용까지 고려해야 한다.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이 지향하는 현장 실증과 기술이전·사업화 역시 새로운 기술이 실제 콘텐츠 제작과 운영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확인하는 과정과 연결돼야 한다.

물론 현장의 모든 어려움이 새로운 기술개발의 대상은 아니다. 불명확한 기획과 과업범위, 계약 및 저작권 처리, 운영주체의 역량 부족은 기술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기존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문제와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문제도 구분해야 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려면 기술적 난제와 기획·제도의 문제를 가려내는 판단부터 필요하다.

현장의 질문을 산업의 과제로

이번 얼라이언스는 전체 위원의 의견을 수렴하고, 별도의 전략기획단에서 시장성과 시급성, 기술적 타당성 등을 검토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중요한 것은 제안된 기술수요의 숫자보다 그 내용이다. 특정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능과 산업 전반에서 반복되는 문제는 다를 수 있다. 정부 R&D는 개별 기업이나 창작자가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고, 여러 현장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 과제를 발굴하는 데 의미가 있다.

제1기 문화기술 얼라이언스 출범식에서 행사 관계자와 참여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술기획책임자(PD)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번 출범식에서는 한국문화기술기획평가원의 김현문·강동주·김성진 PD가 네 개 분과의 리더로 소개됐다. 분야별 현장의 요구가 구체적인 연구개발 과제로 발전하려면 기술적 가능성과 산업적 파급효과를 함께 판단하는 기획 전문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창작자와 제작사, 기술기업과 연구기관이 문제를 정의하는 단계부터 협력하고, PD를 비롯한 기술기획 전문인력이 이를 산업 공통의 과제로 구체화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연구개발의 성과 역시 기술 구현에 머무르지 않고 제작의 효율, 콘텐츠의 품질과 신뢰성, 현장에서의 활용 가능성으로 이어지는지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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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술 얼라이언스는 오랫동안 강조돼 온 현장 중심 R&D의 원칙을 새로운 기술환경에서 구체화할 기회다. 참여 규모나 제안 건수만으로 성과를 판단하기보다, 어떤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고 실제 기술개발과 현장 적용으로 발전시켰는지 확인해야 한다. 문화가 기술을 이끈다는 것은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문화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먼저 묻는 일이다. 그 질문이 기술개발의 출발점이자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이창근 헤리티지랩 소장 · 예술경영학박사(Ph.D. in Arts Management)

*필자는 제1기 문화기술 얼라이언스 영상·미디어 콘텐츠 분야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