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의 글로벌 전략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K-콘텐츠의 글로벌화를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했던 단어는 ‘수출’이었다. 한국에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해외 플랫폼과 유통망을 통해 세계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이다. K-팝, 드라마, 영화, 웹툰 등이 이러한 모델을 통해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K-콘텐츠가 글로벌 무대에서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디에 더 팔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지역이 중앙아시아다.
광주에이스페어(ACE Fair)의 공식 행사로 개최된 ‘K-콘텐츠 아카데미 포럼(KOCAF) 중앙아시아 콘텐츠 협력 포럼’에서 한국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의 미디어·콘텐츠 전문가들이 모여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필자가 포럼을 진행하면서 확인한 것은 중앙아시아가 더 이상 K-콘텐츠의 주변 시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젊은 인구와 디지털·모바일 친화적인 이용자, 고유한 역사와 문화적 자산, 그리고 한국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과 함께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다시 세계 시장으로 가져갈 수 있는 잠재력이 큰 파트너다.
중앙아시아를 ‘시장’이 아닌 ‘파트너’로
중앙아시아 콘텐츠 시장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아직 ‘K-콘텐츠를 얼마나 수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만으로는 지속가능한 협력 생태계를 만들기 어렵다. 콘텐츠는 다른 상품과 달리 문화와 정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래서 번역과 더빙만 잘한다고 현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의 역사와 가치관, 가족관, 유머, 세대 감각까지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실제로 이번 포럼에서 소개된 카자흐스탄 협력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현지 최초의 K-팝 공연이 예매 시작과 함께 매진됐고, 한국과 카자흐스탄 제작사 간 협력이 영화와 리메이크 공동제작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분명하다. 상대국의 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하고, 좋은 현지 파트너가 좋은 콘텐츠를 만들며, 단발성 프로젝트보다 지속가능한 협력 구조가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공진화(Coevolution)’란 개념이 중요해진다.
공진화는 어느 한쪽이 만들어 다른 쪽에 판매하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주체들이 협력 과정에서 함께 변화하고 성장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콘텐츠 산업에 적용하면 한국의 기획·제작 역량과 기술, 글로벌 네트워크에 중앙아시아의 이야기와 인재, 다양한 문화적 자산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Made in Korea’에서 ‘Made with Central Asia’로의 전환이다.
공동제작을 넘어 ‘공동 IP’로 가야 한다
콘텐츠 분야에서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공진화를 위해서는 첫째, 협력의 목표를 단순 공동제작보다 공동 IP 개발에 둬야 한다. 진정한 공동제작은 제작비를 분담하거나 촬영지를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창작 권한과 IP를 실질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글로벌 OTT 시대에는 특히 IP의 소유와 활용 권한이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을 결정한다. 이번 포럼에서도 국제 공동제작의 핵심으로 자원과 위험의 분산뿐 아니라 시장 접근성 확대, 전략적 IP 배분과 창작 리더십이 강조됐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제작사가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즈스탄의 창작자와 기획 단계부터 드라마·예능·애니메이션을 공동 개발하고 IP를 함께 소유한다면 양측 모두 이해관계자가 된다. 이후 글로벌 OTT, 유튜브, FAST 등으로 유통하면서 성과까지 공유할 수 있다.
특히 이번 포럼에서 소개된 음식(food)은 흥미로운 출발점이다. 음식에는 역사와 문화, 관광과 라이프스타일이 함께 담겨 있고 언어 장벽도 상대적으로 낮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음식과 사람, 역사를 결합한 '푸드 팩추얼 콘텐츠'를 공동 IP로 개발한다면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AI와 엔터테크 협력도 새로운 축이다
둘째는 AI와 콘텐츠 기술을 결합한 엔터테크 협력이다. 중앙아시아를 기술 수요국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카자흐스탄 미디어 기업들은 이미 뉴스, 음성, 디자인 등 방송 제작 과정에 AI를 적극 활용하면서 제작 프로세스를 단축하고 인력을 보다 창의적인 업무에 집중시키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는 국제AI센터 ALEM.AI를 중심으로 AI 생태계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다른 포럼에 참석한 중앙아시아 국가들 또한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콘텐츠 제작에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사례를 소개했다.
한국이 가진 AI·버추얼 프로덕션·XR·실감콘텐츠 기술과 중앙아시아의 문화 자산을 결합한다면 새로운 형태의 협력이 가능하다. AI 기반 다국어 콘텐츠 제작과 현지화, 버추얼 프로덕션 공동 스튜디오, 문화유산의 XR 콘텐츠화, AI 기반 애니메이션 공동제작 등이 대표적인 분야다.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와 유목문화, 자연환경, 역사적 서사는 글로벌 콘텐츠의 훌륭한 원천이다. 기술은 한국이 제공하고 이야기는 중앙아시아가 제공하는 식의 단순한 역할 분담을 넘어서 기술과 스토리 자체를 처음부터 함께 설계하는 공동 창작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결국 공진화의 핵심은 ‘사람’이다
셋째, 정부와 산업의 협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창작자와 인재의 교류다. 이번 포럼에서 필자는 키르기즈스탄과의 협력을 논의하며 기자, PD, 작가, 기술인력 등 젊은 콘텐츠 인재의 상호 교류 필요성을 제기했다. 방송 프로그램을 사고파는 것보다 사람이 서로의 문화와 제작 현장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중요한 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키르기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AI, 버추얼 프로덕션, XR 등 새로운 제작 기술까지 인적 교류의 영역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정부가 직접 콘텐츠를 만들거나 민간의 창의성을 지나치게 규율하기보다는 공동제작협정, 공동펀드, 인력교류, IP 보호와 정산 체계 등 민간이 안심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역할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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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콘텐츠 협력은 콘텐츠 수출 → 현지화 → 공동제작 → 공동 IP → 글로벌 공동진출 등의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이 중 마지막 단계가 특히 중요하다. 목표는 한국 콘텐츠를 중앙아시아에 더 많이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가 함께 만든 콘텐츠를 동남아시아와 중동, 유럽, 나아가 세계 시장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K-콘텐츠의 글로벌화가 ‘한국에서 만들어 세계로 보내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세계와 함께 만들어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중앙아시아에는 젊은 창작자와 고유한 문화, 아직 충분히 발굴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한국의 콘텐츠 기획·제작 역량과 AI·엔터테크 기술, 글로벌 유통 네트워크가 결합한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콘텐츠와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 K-콘텐츠의 다음 도약은 우리 콘텐츠를 사랑하는 해외 국가들과 함께 만들고, 함께 소유하고, 함께 세계로 나아갈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앙아시아는 콘텐츠 공진화 전략을 함께 도모하기에 더없이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