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에서는 70세의 베테랑 벤 휘태커(로버트 드니로)가 오래된 서류 가방을 들고 30대 대표가 이끄는 패션 스타트업에 입사한다. 숨 가쁜 일터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벤은 수십 년간 쌓아온 삶의 지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정성, 그리고 새로운 문화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유연함으로 그 조직에 점차 스며든다.
국내 리서치 업계에도 영화 속 벤과 빼닮은 인물이 있다. 33년 차 리서치 베테랑이자, 현재 IT 리서치 스타트업 오픈서베이의 사업전략을 총괄하는 박종백 부사장 이야기다.
1994년 리서치 업계에 첫발을 내디딘 후 대형 글로벌 리서치사(밀워드 브라운)의 전무 자리까지 올랐던 그는 2017년, 모든 기득권과 직함을 내려놓고 모바일 리서치 스타트업이었던 오픈서베이에 '사원'으로 합류했다. 보장된 정년과 안락한 임원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식뻘 되는 2030 동료들이 모여 앉은 열린 공간의 책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턴으로 재입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권위와 직급을 내려놓고 인턴의 자세로 커리어 2막을 시작한 셈이다.
리서치의 미래, '모바일' 전환 확신…"빠른 조직 적응 자신했지만 1년 걸려"
10여년 전 박종백 부사장이 오픈서베이에 합류한 결정은 단 하루 만에 이뤄졌다. 2013년부터 모바일 기반 조사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던 그는 모바일 보급률이 90%를 넘어서는 시대 흐름 속에서 리서치의 미래가 모바일에 있음을 확신했다. 여기에 황희영 오픈서베이 대표에 대한 강한 신뢰가 더해지며 주저 없이 스타트업 행을 택했다.
그러나 30년 넘게 몸담았던 전통 리서치 시장과 IT 스타트업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출근 첫날,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앉은 동료들은 자신의 아들·딸과 비슷한 또래였다. "3개월이면 조직에 적응한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실무 툴을 배우고 수많은 슬랙 메시지와 줄임말을 익히며 완전한 적응에 이르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퇴근 후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젊은 세대들이 쓰는 일상 용어나 슬랙 이모티콘 사용법을 물어보곤 했죠. 손가락(타자) 속도는 젊은 동료들보다 한참 느렸고요. 시스템이나 프로덕트 이용법은 개발팀의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일대일로 배워야 했습니다."
박 부사장은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 먼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자신이 모르는 IT 기술과 프로덕트 구조는 동료들에게 솔직하게 배웠고, 대신 자신이 가진 리서치 설문 설계 노하우, 클라이언트 대응법, 데이터 분석 기법을 아낌없이 나눠주기 시작했다.
33년 쌓은 개인 리서치 노하우, 투명하게 공유하고 기록으로 남겨
박 부사장이 오픈서베이에서 수행한 가장 핵심적인 역할 중 하나는 '지식의 공유'였다. 전통적인 리서치 업계에서는 개인이 가진 노하우와 인사이트가 사유화되기 쉽다. 하지만 박 부사장은 오픈서베이 특유의 '투명한 기록 문화'에 깊이 공감하며 자신의 33년 자산을 시스템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주니어 동료가 업무 중 고민을 들고 찾아오면, 박 부사장은 단순히 답을 말해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방금 나와 나눈 이야기를 슬랙 Q&A 채널에 올려봐. 네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 줄게"라며 모든 질의응답을 문서화하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수년간 쌓인 수천 건의 질의응답과 피드백 데이터는 오픈서베이의 자산이 됐다. 이 기록들은 최근 오픈서베이가 선보인 AI 기반 리서치 전용 플랫폼 '데이터스페이스 AI'를 학습시키는 핵심 도메인 지식 데이터로 활용됐다. 한 리서치 베테랑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33년의 암묵지가 AI 플랫폼의 엔진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글로벌 리서치사 시절, 한 CEO가 '우리의 지식을 갖고 나간 퇴사자 역시 우리의 철학을 전파하는 사람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 노하우가 회사의 시스템이 되고, AI로 구현돼 세상에 퍼지는 것을 보는 것은 리서처로서 매우 가슴 뛰고 보람찬 경험입니다."
그는 새로운 테크 툴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았다. 최근에는 클로드 등 최신 AI 툴을 실무에 적극 도입하며 프롬프트 작성법이나 세련된 비즈니스 표현법을 오히려 주니어 동료들에게 역으로 배우고 있다. AI가 데이터를 빠르게 요약하고 처리해 주면, 박 부사장은 그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데이터의 행간에 숨은 맥락이 무엇인지를 특유의 통찰력으로 검증해 준다. AI와 베테랑, 그리고 청년 동료들이 만들어내는 선순환의 멘토링 체계다.
시니어가 시니어에게 묻다...."그 일 정말 재밌나요?"
AI가 리서치 시장 전반을 급격하게 바꾸고 있는 지금, 박종백 부사장이 바라보는 AI 시대 리서처의 본질은 확실하다. AI는 매우 뛰어난 수행자이지만, 결국 명확한 지침을 주고 나온 결과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눈'이라는 점이다.
"AI가 뱉어낸 결과가 맞는지 틀린 지를 가려내려면 역설적으로 데이터와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단순 작업은 AI가 대체하겠지만, 데이터에 기반해 고객의 진짜 고민을 해결해 주는 통찰의 영역은 더욱 중요해질 거예요."
후배 리서처들과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시니어들에게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일이 정말 재미있는가?"라고 스스로 물어봤으면 한다고 답했다.
이어 박 부사장은 오픈서베이에서의 지난 10년을 '재미있는 취미생활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주말에 나와 엑셀 수식을 풀고, 어린 동료들과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누며, 거대한 데이터 플랫폼이 구축되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최고의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청와대 AI 정책 맡는 이해민은 누구…구글 거쳐 국회서 AI 입법 주도2026.08.30
- 오픈서베이, AI가 신제품 아이디어 만들어 소비자 검증까지 도와준다2026.08.11
- 오픈서베이 데이터스페이스, ‘합성 소비자와 대화’ 기능 추가2026.07.09
- 오픈서베이 "설문 기획부터 결과까지 AI와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2026.06.24
"변화는 막상 부딪쳐보면 별것 아닙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과거의 경험과 성공 방정식에 매몰돼 도태되는 것이죠. 오픈서베이가 만들어갈 데이터와 AI 기반 리서치 플랫폼의 끝이 어디일지, 그 미래를 함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여전히 저를 설레게 합니다."
영화 인턴의 벤이 조직에 따뜻한 온기와 지혜를 불어넣었듯, 박 부사장은 오픈서베이의 혁신을 받쳐주는 '참어른'의 역할에 충실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AI라는 거친 파도를 넘어서는 회사의 든든한 등대 같았다. 그는 또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지식 자산과 경험이 충분히 남아있다고 자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