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사람이 떠난 뒤에도 장소에는 시간이 남는다. 학교가 문을 닫아도 그곳에서 배우고 뛰놀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차가 멈춘 철교에는 사람들이 오가던 흔적이 남고, 한 작가가 오래 살며 글을 쓴 마을에는 작품 밖의 삶이 쌓여 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7월 선정한 ‘2026 지역수요맞춤지원 사업’을 다시 들여다봤다. 15개 사업 가운데 홍천 폐교와 안동 폐철교, 정선 민둥산역 일원처럼 쓰임이 줄거나 멈춘 공간을 다시 지역의 생활거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눈에 들어왔다. 국토부도 올해는 기반시설 건설에 그치지 않고 주민이 실제로 이용하는 사업과 유휴자산 활용을 중점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정 사업들은 계획을 구체화한 뒤 202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공간의 성격과 쓰임을 먼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 무엇을 넣을 것인가에 앞서 한 번쯤 물어야 한다.
그곳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비어 있어도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휴공간 사업에서는 면적과 구조, 접근성, 사업비, 필요한 시설을 먼저 살핀다.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공간의 다음 쓰임을 정하려면 그곳이 지나온 시간도 함께 살펴야 한다. 누가 이곳을 사용했는지, 사람들은 어디로 드나들었는지, 주민들은 무엇을 기억하는지, 주변 마을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봐야 한다.
안동철교는 장기간 방치된 폐철교를 보행공간과 쉼터로 바꿔 단절된 생활권을 잇는 사업이다. 철교는 원래 사람과 물자가 건너던 시설이다. 철도는 멈췄지만 다시 사람이 걷는 길이 된다. 용도는 달라져도 ‘건너고 잇는 곳’이라는 장소의 성격은 남는다.
홍천에서는 폐교를 어린이·가족 중심의 예술·기술 융합 창작문화 플랫폼 ‘NEST’로 바꿀 계획이다. 어린이와 가족이 예술과 기술을 체험하고 창작하는 문화공간으로 폐교를 다시 쓰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서도 무엇을 설치할 것인가만큼 학교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교실과 복도, 운동장은 오랫동안 배움과 놀이가 일어나던 공간이다. 그 기억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문화시설을 만드는 것과, 일부를 남겨 새로운 창작 경험으로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든다.
유휴공간은 쓰임을 잃었을 뿐, 시간이 비어 있는 곳은 아니다.
새 기능에는 그 장소의 이유가 필요하다
유휴공간을 바꿀 때 카페와 전시장, 책방, 체험공간, 미디어아트 같은 기능이 자주 등장한다. 필요하면 넣을 수 있다. 다만 왜 그것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능은 옮길 수 있지만 장소는 옮길 수 없다.
정선 민둥산역 일원 사업은 유휴시설을 활용해 역과 마을, 민둥산을 잇는 사계절 관광거점과 주민 커뮤니티 허브를 조성하는 계획이다. 이 사업에서 눈여겨볼 것은 건물 하나보다 그 사이의 길이다. 역에서 내린 사람이 어느 길로 마을에 들어가고, 어디에서 쉬고, 어떻게 민둥산으로 향하는지에 따라 지역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장흥 안양 율산에서는 한승원 작가의 창작자산을 바탕으로 복합문화공간과 문학공원, 교육·문학 프로그램을 조성한다. 문화자원은 오래된 건축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보고 듣고 쓰며 살아온 시간도 장소를 설명하는 자산이 된다.
책방과 문학공원을 만드는 데서 끝날 일도 아니다. 어떤 풍경을 보며 걷게 할 것인지, 작품과 마을을 어디에서 만나게 할 것인지, 얼마나 오래 머물게 할 것인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시설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재생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장소를 읽고 무엇을 남길지 정한 뒤 필요한 기능을 찾는 편이 낫다. 사람의 동선과 콘텐츠, 운영도 이때부터 함께 봐야 한다. 건축이 끝난 뒤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 공간과 콘텐츠가 따로 놀기 쉽다.
다시 쓰이는 장소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새 공간의 개장식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다음의 평일이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주민이 그 길을 걷는지, 아이들이 다시 찾아오는지, 지역 사람들이 공간을 쓰고 프로그램을 이어가는지를 봐야 한다. 공간의 쓰임은 문을 여는 순간보다 그 이후의 일상에서 드러난다.
국토부가 이번 사업에서 주민의 실제 이용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과 주민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목표일 필요가 없다. 외지인에게는 찾아갈 이유가 있고, 지역 사람에게는 계속 사용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함께할 때 공간은 지역 안에 자리를 잡는다.
운영도 준공 뒤에 생각할 일은 아니다. 누가 공간을 맡을지, 어떤 프로그램을 지속할지, 주민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를 미리 살피면 공간설계도 달라진다. 결국 공간을 오래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시설 자체보다 그곳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내년부터 사업이 본격화되면 지금의 구상은 설계와 공사를 거쳐 실제 장소가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모습을 모두 남길 필요는 없다. 다만 폐교에는 학교였던 시간이 있고, 철교에는 사람들이 건너던 시간이 있다. 역에는 오고 간 시간이 있으며, 문학의 장소에는 한 사람이 보고 듣고 쓰며 살아온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빈 공간에도 시간이 남아 있다. 좋은 재생은 그 시간을 지우고 새것으로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을 오늘의 쓰임과 이어주는 일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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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자원과 오래된 장소의 가치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 공간과 도시 경험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의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 ‘명경(名景)’을 운영하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