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지식재산처를 비롯한 글로벌 주요 특허청의 정책 화두 중 하나는 '심사 처리 기간 단축'과 '조기권리화'다.
미국 특허상표청(USPTO)의 '트랙 원(Track One)' 우선심사는 관납료를 추가로 내면 12개월 이내 최종 처분하는 것이 목표다. 한국을 포함한 IP5 주요국은 특허심사하이웨이(PPH)로 서로 신속 심사를 연동한다. 유럽특허청(EPO)도 페이스(PACE) 제도로 심사를 앞당길 수 있다.
이런 제도는 자본과 시간이 부족한 스타트업·중소기업 입장에서 특히 유리하다. 기업설명회(IR) 미팅에서 투자심사역이 "등록특허가 있느냐"고 묻는 순간, 아직 등록받지 못한 특허와 등록을 마친 특허는 협상 테이블에서 무게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을 멈추면 함정에 빠진다. 특허로 투자·매출·라이선스 수익을 만들어야 하는 스타트업·중소기업 입장에서 "가장 빨리 등록받는 것이 정답인가"라는 질문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자원이 넉넉한 대기업보다 스타트업·중소기업이 속도전 부작용에 더 취약하다. 한 번 특허가 부실하게 확정되면 이를 되돌릴 후속 출원 예산도, 대응 소송에서 버틸 체력도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빠를수록 특허가 약해지는 세 가지 함정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문제는 등록은 빨랐지만 권리범위가 껍데기만 남을 정도로 축소되는 것이다. 등록을 서두르면 선행기술 거절이유를 정면 돌파할 논리나 실험 데이터를 보강할 시간을 벌지 못하고, 청구항에 한정사항을 덧붙여 범위를 좁히는 손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대기업이라면 이후 유사 기술을 추가 출원해 보완할 여력이 있지만, 인력과 예산이 한정된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IR 자료에 넣을 등록특허 1건"을 만드는 데 그치고, 정작 그 특허는 경쟁사가 청구항 문구(구성요소) 하나만 살짝 비켜가도 특허권 권리범위를 회피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조차 분리막(SRS) 한국 특허가 2012~2013년 무효심판과 소송에서 패해 청구범위를 정정(축소)해야 했다. 반면, 같은 발명의 미국 특허는 청구항 구성이 달라 넓은 권리범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오늘날 중국 경쟁사 상대 소송과 라이선스에서 결정적 무기가 됐다. 대기업조차 한 나라에서 특허가 좁아지는 리스크를 겪는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여러 나라에 동시에 출원할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애초에 '단 하나의 좁은 특허'만 갖게 될 위험이 훨씬 크다.
두 번째 문제는 경쟁사 회피설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점이다. 출원 상태를 유지하며 경쟁사의 변형 제품을 관찰하고 청구범위를 보정하거나 분할출원하는 '맞춤형 청구항 구성'은 침해소송·라이선스의 핵심 무기이지만, 특허가 너무 일찍 확정되면 재구성 여지가 사라진다. 미국 반도체 설계자산(IP) 기업 램버스(Rambus)가 계속출원·분할출원을 반복하며 업계 표준화 논의를 지켜본 뒤 청구항을 표준 규격에 맞춰 정교하게 보정해 강력한 특허망을 구축했던 사례는 이 전략의 힘을 보여준다.
스타트업이 대형 분쟁을 벌일 일은 드물겠지만, 원리는 같다. 시장에 제품을 먼저 내놓은 뒤 후발주자가 어떤 식으로 베끼거나 살짝 변형한 제품을 출시하는지 지켜보며 청구항을 다듬을 여지를 둬야 하는데, 너무 일찍 등록하면 이 여지를 스스로 없애버릴 수 있다.
세 번째는 국가별 제도 차이로 인한 전략적 불균형이다. 미국에서는 계속출원으로 장기간 심사를 유예하며 시장을 모니터링하는 전략이 일반적이지만, 한국에서 초고속 등록만 밀어붙이면 동일 기술이 한국에서는 좁게, 해외에서는 넓게 확정되는 불균형이 생긴다.
다만 완급조절에도 상한은 필요하다. 과거 미국에서는 계속출원을 수십 년 반복해 등록을 고의로 지연시키다 업계가 기술을 채택한 뒤에야 특허를 '부상'시켜 로열티를 챙기는 이른바 '잠수함 특허' 폐해가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1995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이행법으로 특허 존속기간 기산점이 등록일에서 출원일로 바뀌었다. 즉 "천천히, 오래 끌수록 유리하다"는 전략은 이제 어느 나라에서도 무제한으로 통하지 않는다. 완급조절은 무기한 지연이 아니라 '언제 등록을 받을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선택권 보장, 미국 제도에서 배울 것들
문제는 한국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지만, 막상 그 설계를 뜯어보면 출원인이 손해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 편히 선택할 수 있는 수준까지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심사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단계별로 얼마나 촘촘하게 마련했는지, 그리고 한국의 대응 제도는 어디가 다른지 하나씩 짚어보면 간극이 분명해진다.
먼저 가출원(Provisional application)이다. 미국에선 정식 심사에 들어가기 전 청구항 없이 발명 내용만 담아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우선일을 확보할 수 있고, 출원 후 12개월 동안 시장 반응과 투자 유치를 지켜본 뒤 정식 출원 여부와 청구항 구성을 결정할 수 있다.
한국도 지난 2020년부터 임시명세서 출원, 이른바 '가출원' 제도를 시행하며 형식을 갖추지 못한 자료로도 먼저 출원일을 확보할 길을 열었다. 다만 이 제도는 완전히 새로 만든 단일 트랙이 아니라 기존 청구범위 유예 제도와 외국어 출원 제도를 조합해 만든 것이다. 출원 후 정식 명세서와 청구항을 갖추기까지 거쳐야 할 절차가 미국의 '한 장짜리' 가출원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만큼 스타트업 같은 업체에는 덜 알려졌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만든 제도를 하나의 이름 아래 더 단순하고 눈에 띄게 정비해 실제 쓰이도록 만드는 것이 숙제다.
두 번째는 심사 시점을 고르는 권한이다. 미국의 심사유예(Deferral of Examination, 37 CFR 1.103(d))는 출원인이 요청하면 최초 출원한 날로부터 최대 3년까지 심사 착수를 미룰 수 있다. 한국에도 출원일로부터 3년 내라면 언제든 심사청구를 해 심사 착수 시점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심사청구 제도가 있어, 큰 틀에서는 미국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은 유예를 신청해도 출원 자체는 그대로 살아 있다가 기간이 지나면 심사가 정상적으로 재개되지만, 한국은 3년 안에 심사청구를 하지 않으면 그 출원을 아예 취하한 것으로 간주돼 권리를 등록받을 수 없다. 시장을 좀 더 지켜보려다 기한을 놓치는 순간, 쌓아온 우선일까지 통째로 잃는 구조다.
소수 인력이 여러 업무를 겸하는 스타트업일수록 이런 기한을 잘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크므로, 기한을 넘긴 경우에도 추가 수수료를 내고 권리를 되살릴 수 있는 구제절차를 마련하는 방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특허존속기간 조정(Patent Term Adjustment)이다. 미국은 심사가 늦어진 책임이 특허청에 있으면 전체 처리기간이 기준을 넘지 않더라도, 최초 거절이유통지가 일정 기간 안에 나오지 않는 등 심사 단계별로 특허청 책임의 지연이 있었는지 따져 존속기간에 이를 반영한다.
한국의 등록지연 존속기간 연장 제도(특허법 제92조의2)는 출원일로부터 4년, 심사청구일로부터 3년 중 더 늦은 날을 넘겨 등록이 지연된 경우에만 그 초과 일수를 연장해준다. 한국 제도는 '최종 결과'가 기준을 넘었는지만 보고, 미국 제도는 '과정의 각 단계'까지 들여다보는 셈이다. 심사관별로 처리속도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전체 기간 기준 외에 단계별 지연도 조정 대상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제도 산정 기준을 넓힐 필요가 있다.
마지막은 우선심사 제도 자체 설계다. 미국 트랙 원은 발명 분야나 정책 명분과 무관하게 정해진 수수료만 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대신, 연간 신청 건수(2025회계연도 기준 2만 건)에 상한을 둬 심사관 업무 부담이 폭증하지 않도록 총량을 관리한다.
한국의 우선심사는 방위산업, 녹색기술, 벤처기업, 수출 관련 등 정책적으로 열거된 사유에 해당해야 신청할 수 있는 '사유 열거형'에 가깝다. 한국도 우선심사 문호를 넓히는 논의가 필요하다면, 사유를 하나씩 추가하는 열거형 방식보다는 총량을 관리하며 문호 자체를 넓히는 미국식 설계를 검토할 만하다.
네 가지를 보면 공통점이 드러난다. 미국은 "얼마나 빨리 등록받을 것인가"의 결정권을 특허청이 아니라 출원인에게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선택에 손해가 따르지 않도록 세부 장치까지 촘촘하게 갖추고 있다. 한국에도 형식적으로는 대응되는 제도가 있지만, 선택의 결과가 출원인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구제절차와 산정 기준, 신청 문호를 다듬는 후속 작업이 남아 있다.
짚어야 할 문제는 또 있다. 제도가 있다는 사실과, 그 제도를 기업이 실제 쓰고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는 점이다. 임시명세서 출원 제도가 시행된 2020년 이후 초기 활용 현황을 보면, 이 제도를 가장 많이 쓴 곳은 정작 자원이 부족한 스타트업이 아니라 LG전자(1191건)와 삼성전자(637건) 같은 대기업이었다. 적은 비용으로 우선일을 확보하도록 설계한 제도조차 정보와 실무 역량을 갖춘 대기업이 선점하고, 그 제도가 절실한 중소기업·스타트업에는 오히려 덜 알려진 셈이다.
심사청구 시점을 늦추는 것도 마찬가지다. 통계상 그해 출원된 건 중 당해연도에 곧바로 심사청구되는 비율은 58~62%에 그쳐 나머지는 어떤 형태로든 시점을 늦추고 있지만, 이 유예가 자원이 부족한 스타트업의 전략적 선택인지, 단순히 심사청구 비용을 미룬 결과인지는 통계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다.
정책 당국 메시지도 한몫한다. 지식재산처는 최근 "이차전지 기업 특허 19일 만에 등록", "인공지능(AI) 창업기업 17일 만에 특허 획득" 같은 사례를 앞세우며 2025년 10월에는 수출·첨단기술 기업을 대상으로, 2026년 2월에는 AI·바이오 창업기업으로 대상을 넓혀 "세계에서 가장 빠른 1개월 내 심사서비스"를 정책 간판으로 내걸었다.
이런 홍보에서 심사유예나 존속기간 조정처럼 속도를 늦추는 선택지는 좀처럼 함께 언급되지 않는다. 정책 당국이 '빠를수록 좋다'는 메시지만 반복하면, 정작 신중한 청구항 설계가 필요한 기업조차 "우리도 최대한 빨리 등록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하기 쉽다.
조기권리화 정책이 진짜 '선택권 보장'이 되려면 '속도를 낼 수 있는 문(Track One)'뿐 아니라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문(심사유예)'과, '늦춰도 손해 보지 않는 안전장치(존속기간 조정)'를 함께 갖춰야 한다. 그 문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스타트업·중소기업도 알 수 있도록 정책 홍보 무게중심부터 조정해야 한다. 제도 존재를 알리는 것 못지않게, 그 제도를 언제 쓰는 것이 유리한지에 대한 균형 잡힌 안내와 홍보가 절실한 이유다.
기업의 대응: '이원화'보다 '선택'
기업, 특히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스스로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답은 대기업식 '이원화'가 아니라 '선택'이다. 모든 핵심 기술을 우선심사 트랙과 심사유예 트랙으로 동시에 나눠 운영할 자원은 없더라도, 최소한 어떤 출원 건을 우선심사로 빠르게 등록받아 IR·계약 협상에 활용할지, 어떤 출원 건을 가출원이나 심사유예를 활용해 시장 반응과 경쟁사 움직임을 지켜본 뒤 국내우선권 주장출원이나 분할출원으로 청구범위를 다듬을지 처음부터 구분해서 출원 전략을 짜야 한다.
회사 존속을 좌우할 핵심 원천기술 하나를 서둘러 등록받았다가 좁은 권리범위 때문에 나중에 되돌리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자원이 부족한 기업이 가장 피해야 할 시나리오다. '빠를수록 특허는 약해진다'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속도 그 자체가 아니라 속도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에 있다.
특허 행정의 궁극적 목표는 '빠른 특허의 대량 양산'이 아니라 '기업을 시장에서 진짜 지켜주는 강력한 IP 창출'이다. 지식재산처는 정책 무게중심을 질적 완성도와 선택권 보장으로 옮기고,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많지 않은 출원 예산 안에서도 심사 속도 기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섬세한 제도적 보완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 강화 도우미가 돼야 할 것이다.
필자 박병욱
테스 IP법무팀장과 한국표준협회 산업표준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아이피코드 대표, 동국대 겸임교수, 지식재산처 정책연구 심의위원, 한국발명진흥회 중앙위원, INTA Commercialization of IP 멤버 등을 맡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