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는 오래된 장소를 과거의 흔적으로만 보지 않고 오늘의 도시가 다시 읽어야 할 문화자산으로 바라보는 연재입니다. 시즌1이 도시와 유산을 전략과 경험, 콘텐츠의 관점에서 읽었다면, 시즌2는 세계유산과 오래된 장소를 도시의 기억, 감각, 표정의 언어로 다시 해석합니다. 사람은 유산의 이름보다 그 도시를 걸었던 감각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이번 시즌은 인문 에세이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의 시선을 바탕으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부산 벡스코, 2026년 7월 19~29일)와 민선 9기 지방정부 출범을 함께 바라보며 도시와 유산이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읽어냅니다. 시즌2는 2026년 6월 29일부터 7월 31일까지 주 1~2회씩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성곽이 있는 도시에 들어서면 먼저 선이 보인다.
그 선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처럼 보인다. 성벽은 도시를 두르고, 성문은 출입을 가르고, 높은 곳의 장대는 도시를 내려다본다. 처음에는 성곽을 방어시설로 이해하게 된다. 적을 막고, 도시를 지키고, 안쪽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벽.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성곽을 따라 걸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성곽은 단지 도시를 막아선 벽이 아니다. 그 선은 도시를 걷게 하고, 도시를 다시 보게 하며, 도시가 어디에서 자기 표정을 갖는지를 알려준다. 성곽은 경계이면서 동시에 길이다. 막기 위해 세운 구조가 오늘에는 도시를 읽게 하는 선이 된다.
종묘가 고요로 시간을 말하고, 창덕궁이 아름다움으로 질서를 말한다면, 성곽은 선으로 도시의 성격을 말한다.
성곽은 도시의 외곽선이다. 그러나 단순한 가장자리는 아니다. 그 선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의 중심과 주변, 안과 밖, 높은 곳과 낮은 곳이 함께 읽힌다. 어느 지점에서는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고, 어느 지점에서는 성 밖의 풍경이 열린다. 성곽은 도시를 안쪽에서만 보지 않게 한다. 도시를 둘러보게 하고, 동시에 도시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묻게 한다.
성곽은 걷는 유산이다.
건물은 한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성곽은 한 자리에서 다 읽히지 않는다. 성문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장대 하나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성벽을 따라 걸어야 한다. 길이 꺾이는 곳에서 도시의 방향을 느끼고, 높이 오른 곳에서 안팎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다시 생활권 가까이 내려오며 성곽이 오늘의 도시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수원화성을 떠올리면 이 감각은 더 분명해진다. 수원화성은 성곽만 따로 떨어져 남아 있는 유산이 아니다. 성문과 수문, 장대와 공심돈, 성벽과 길, 성 안팎의 도시가 함께 읽힐 때 비로소 살아난다. 성곽은 도시를 둘러싼 벽이지만, 오늘의 사람에게는 도시를 걷게 하는 길이 된다. 그 길 위에서 사람은 유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자세를 몸으로 익힌다.
좋은 성곽은 성벽만 남기지 않는다. 도시의 골격을 남긴다. 어디가 중심이고 어디가 입구인지, 무엇이 안과 밖을 나누는지, 사람들이 어떤 방향으로 모이고 흩어졌는지, 어느 지점에서 도시가 가장 자신다운 표정을 갖는지가 성곽을 통해 드러난다. 성곽은 도시의 겉모양이 아니라 도시의 자세를 만든다.
성곽길은 목적지보다 시선을 바꾼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성곽길에서는 보인다. 성벽의 굴곡, 돌의 결, 문을 지나는 리듬, 길의 높낮이, 멀리 산과 하늘이 이어지는 방향 같은 것들이다. 성곽을 걷는 동안 사람은 도시를 정보로 이해하기보다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성곽은 도시를 설명하기보다 먼저 걷게 한다.
성곽은 역설적인 유산이다. 처음에는 막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오늘에는 열어주는 장소가 되었다. 적을 막기 위한 벽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에게 도시 전체를 바라보게 하는 길이 된다. 과거의 방어 구조가 오늘의 보행 경험이 되고, 경계의 장치가 도시를 이해하는 시선의 장치가 된다.
수원화성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성곽은 과거의 구조물로만 남아 있지 않다. 오늘의 도시와 함께 호흡한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는 역사적 구조가 보이고, 어느 지점에서는 생활의 거리와 맞닿는다. 성곽 안팎에는 사람들이 살고, 걷고, 머물고, 다시 찾아온다. 수원화성은 과거의 성곽이면서 오늘의 도시 동선이다.
성곽은 경계였지만, 오늘에는 관계가 된다.
성 안과 성 밖, 과거와 현재, 유산과 생활, 방어와 산책, 구조와 감상이 성곽 위에서 만난다. 이 만남이 성곽을 단순한 유적으로 머물지 않게 한다. 성곽이 좋은 유산이 되려면 성벽이 잘 남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그 선을 따라 걷고, 도시를 다시 바라보고, 그 장소가 남긴 시간의 방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세계유산도 마찬가지다. 이름과 등재기준만으로는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어떤 유산은 사람의 동선을 바꾸고, 도시의 시선을 바꾸며, 다시 걷고 싶은 길로 남는다. 성벽은 오래된 구조물이지만, 성곽길은 오늘의 사람이 유산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부산에서 열리는 올해, 우리는 세계유산을 다시 말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유산을 말한다는 것은 등재의 이름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수원화성이 보여주듯, 장소의 가치는 성벽의 보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성벽이 오늘의 도시 안에서 어떤 길이 되고, 어떤 시선이 되며, 어떤 기억의 선으로 이어지는지까지 함께 물어야 한다.
좋은 유산 도시는 유산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성곽을 배경으로만 두지 않고, 도시를 읽는 길로 살린다. 사람을 다시 걷게 하고, 도시를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게 하며, 과거의 경계가 오늘의 경험이 되도록 한다. 그런 도시에서 성곽은 과거의 방어시설이 아니라 현재의 도시 감각이 된다.
성곽이 도시의 성격이 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걸음걸이가 있듯, 도시에도 자세가 있다. 어떤 도시는 광장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어떤 도시는 강이나 바다로 기억된다. 어떤 도시는 산세와 골목으로 남고, 어떤 도시는 성곽의 선으로 자기 성격을 만든다.
성곽은 도시를 지킨 벽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성곽은 도시를 기억하게 하는 선이다. 그 선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는 도시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무엇을 중심에 두었는지, 어디에서 자신다운 표정을 만들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성곽은 도시의 바깥을 두른 구조물이 아니라 도시의 성격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성곽을 읽는다는 것은 방어의 역사를 읽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한 도시가 어떤 자세로 자신을 둘러싸고, 어떤 길로 사람을 걷게 하며, 어떤 시선으로 스스로를 기억하게 하는지를 읽는 일이다. 세계유산은 오래 남은 돌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그 도시를 어떻게 걷고,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억하게 되는가에도 있다.
성곽은 도시를 지킨 경계였지만, 오늘에는 도시를 걷게 하는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선을 따라 걸을 때, 도시는 비로소 자기 성격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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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예술-기술 칼럼니스트이자 인문 논픽션 작가다. 오래된 장소를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걷고 머물고 기억하게 만드는 일을 20년 넘게 현장에서 고민해왔다. 문화유산과 도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며, 장소에 남은 시간의 결이 오늘의 도시에서 어떤 표정으로 되살아나는지를 질문해왔다. 현재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미다스북스에서 펴낸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지디넷코리아에서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을 연재하며, 장소의 시간과 도시의 표정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