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람은 왜 유산의 이름보다 그 도시의 감각을 기억하는가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 시즌2] ①도시는 설명보다 먼저 인상으로 남는다

전문가 칼럼입력 :2026/06/29 10:39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이 시리즈는 오래된 장소를 과거의 흔적으로만 보지 않고 오늘의 도시가 다시 읽어야 할 문화자산으로 바라보는 연재입니다. 시즌1이 도시와 유산을 전략과 경험, 콘텐츠의 관점에서 읽었다면, 시즌2는 세계유산과 오래된 장소를 도시의 기억, 감각, 표정의 언어로 다시 해석합니다. 사람은 유산의 이름보다 그 도시를 걸었던 감각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이번 시즌은 인문 에세이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의 시선을 바탕으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부산 벡스코, 2026년 7월 19~29일)와 민선 9기 지방정부 출범을 함께 바라보며 도시와 유산이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읽어냅니다. 시즌2는 2026년 6월 29일부터 7월 31일까지 주 1~2회씩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사람은 유산의 이름보다 그 도시를 걸었던 감각을 더 오래 기억한다.

어떤 도시는 설명보다 먼저 공기로 다가온다. 돌담의 높이, 길의 폭, 오래된 나무의 그늘, 발걸음이 느려지는 순간, 문득 고개를 들게 만드는 처마의 선, 골목 끝에서 마주친 빛의 방향이 먼저 남는다.

우리는 한 도시를 다녀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오래 기억하는 것은 그 도시의 행정구역이나 안내문이 아니라 그곳을 걸을 때 몸에 남은 감각이다.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 저자

유산도 마찬가지다. 유산은 이름으로만 남지 않는다. 세계유산이라는 명칭, 등재 연도, 지정 사유, 보존 가치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은 그보다 더 섬세한 층위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공기의 깊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장면, 한동안 머물고 싶게 만든 고요, 다시 돌아보고 싶어진 마음이 유산의 인상을 만든다.

우리는 흔히 유산을 설명하려 한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지었는지,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를 말한다. 물론 설명은 필요하다. 그러나 설명만으로는 장소가 살아나지 않는다.

설명은 유산을 이해하게 하지만, 감각은 유산을 기억하게 한다. 좋은 유산 도시는 정보를 많이 전달하는 도시가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의 장면을 남기는 도시다.

오래된 장소가 힘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된 장소는 단지 시간이 오래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는 여러 세대의 걸음과 시선, 반복된 의례와 생활, 사라진 것과 남은 것이 겹쳐 있다.

시간은 건물의 표면에만 남지 않는다. 길의 방향, 마당의 비움, 담장의 높이, 창이 열린 방식, 사람들이 머물렀던 자리에도 남는다. 우리가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 것은 그곳에서 과거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의 내가 잠시 다른 속도로 걷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런 감각의 총합으로 기억된다. 한 도시가 세계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도시가 세계유산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보유의 문제이고, 후자는 경험의 문제다.

세계유산을 가진 도시는 많을 수 있지만, 세계유산의 감각으로 기억되는 도시는 많지 않다. 등재는 출발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유산이 도시의 얼굴이 되고, 사람의 동선이 되고, 머무름의 이유가 되고, 다시 찾고 싶은 장면으로 이어지는가에 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선릉과 정릉. 도시 한복판에 남은 오래된 장소는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오늘의 도시가 다시 읽어야 할 시간의 결이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선정릉을 떠올려보면 이 감각은 더 분명해진다. 빌딩과 도로, 빠른 이동과 높은 밀도 사이에 숲처럼 남아 있는 왕릉은 도시의 속도를 잠시 바꾼다.

그곳은 과거가 외딴곳에 보존된 장면이 아니라, 오늘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다른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장소다. 도시는 그렇게 오래된 시간을 품을 때 비로소 하나의 표정을 갖는다.

그래서 유산을 읽는다는 것은 건축물 하나를 읽는 일이 아니다. 도시의 표정을 읽는 일이다. 어느 길로 들어가게 하는지, 어디에서 멈추게 하는지, 무엇을 보게 하고 무엇을 비워두는지, 낮과 밤의 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장소가 시민의 일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함께 읽는 일이다.

유산은 장소 안에 있지만, 그 의미는 도시 전체의 경험 속에서 완성된다.

2026년 7월, 부산에서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다. 세계유산을 둘러싼 국제적 논의가 한국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시간이다. 같은 시기 새 지방정부들도 출범한다. 문화관광, 국가유산, 도시브랜딩, 지역콘텐츠, 공간정책의 방향을 다시 세워야 하는 때다.

이 두 흐름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세계유산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의 질문은 결국 도시가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의 질문과 만난다.

새로운 지방정부가 문화와 유산을 말할 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사업명이나 시설 계획만이 아니다. 사람을 다시 걷게 하는 도시인가, 머물고 싶게 하는 장소인가, 지역의 오래된 시간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유산정책은 보존 구역 안에만 머무는 행정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한 도시의 미래는 무엇을 새로 세울 것인가에만 달려 있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에도 달려 있다. 어떤 도시는 많은 것을 만들고도 흐릿하게 사라지고, 어떤 도시는 한 장면만으로도 오래 남는다.

기억되는 도시는 반드시 크거나 화려한 도시가 아니다. 사람의 걸음을 바꾸고, 시선을 멈추게 하고, 마음속에 다시 걷고 싶은 길 하나를 남기는 도시다.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 - 시즌2]는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세계유산과 오래된 장소를 안내문 속 이름으로만 보지 않고, 도시의 기억과 감각, 표정의 언어로 다시 읽어보려 한다.

유산은 과거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도시가 다시 해석해야 할 문화자산이다. 오래된 장소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사람들이 다시 걷고 머물고 기억할 때 비로소 현재형이 된다.

도시를 오래 남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대개 설명보다 먼저 감각으로 시작된다. 어느 도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연표가 아니라 길이다.

이름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곳의 빛과 공기, 걸음의 속도,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었던 장면이다.

사람은 유산의 이름보다 그 도시를 걸었던 감각을 더 오래 기억한다. 이제 도시와 유산을 다시 읽는 일은 바로 그 감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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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예술-기술 칼럼니스트이자 인문 논픽션 작가다. 오래된 장소를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걷고 머물고 기억하게 만드는 일을 20년 넘게 현장에서 고민해왔다. 문화유산과 도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며, 장소에 남은 시간의 결이 오늘의 도시에서 어떤 표정으로 되살아나는지를 질문해왔다. 현재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미다스북스에서 펴낸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지디넷코리아에서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을 연재하며, 장소의 시간과 도시의 표정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