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엔진’은 우리 문화의 가치 재창출을 위해 칼럼니스트의 비평적 시각과 기자의 보도적 시각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는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를 비롯한 현장 전문가와 지디넷코리아 기자가 함께 집필하며, 독자에게 문화정책·콘텐츠산업·예술현장에 대한 새 소식을 전하고 인사이트를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K-컬처가 미래산업의 엔진으로 재조명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예술은 질문으로 시작해 공감으로 이어진다. 11월 11일부터 12월 21일까지 천안시립미술관에 마련되는 이번 전시는 그 과정을 한 화면에 모아 놓은 문장이다. 또 지역의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고 그 언어를 시민의 경험으로 환류하려는 시도다. 화가이자 디자이너였던 문우식과 서예가 인영선이 남긴 궤적을 병치하며 한국 미술과 서예의 전환점을 점검한다.
두 예술가가 다른 매체로 구축한 시각 언어와 필묵의 문법은 현재의 제작 환경과 관람 경험 속에서도 유효하다. 여기서 행정은 지역문화의 토양이고 정책은 문화향유의 구조다. 전시는 그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는 장면을 사례로 제시한다. 지역에서 출발해 보편으로 확장하는 경로, 그 길 위에 오늘의 천안이 서 있다.
두 길의 교차, 하나의 화두
이번 전시는 천안문화재단의 ‘커넥트 인 천안’ 흐름 속에서 자리 잡는다. 예술의 뿌리 연결이다. 지역 예술가의 유산을 동시대 관람 환경에 맞게 재맥락화하고 학술·아카이브·교육 프로그램과 연동해 시민 체감으로 환류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구조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전시-교육-아카이브-커뮤니케이션이 하나의 여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번 전시는 그 여정의 첫 화면을 비교적 명료하게 보여준다.
문우식은 전후 재건기의 공기를 통과해 산업화의 속도를 견디며 활동했다. 회화와 그래픽의 경계를 열어젖히며 시각문화의 현대화를 실험했다. 화면에 남은 색면과 선은 조형의 완결을 넘어 사회적 표정으로 읽힌다. 그의 작업군은 작품으로 남았을 뿐 아니라 공공 시각문화의 문법을 바꾼 사례로 기능한다. 드로잉과 디자인 원화, 수채의 축적은 예술이 기호 체계이자 노동의 기록임을 입증한다. 그는 예술이 공공의 언어로 전이될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시대의 사용 설명서를 남겼다.
인영선은 전통의 격조를 토대로 현대적 조형을 개척했다. 서체 연구는 전서의 구조미와 행서의 유려함을 유기적으로 접속한다. 붓은 기록의 도구를 넘어 사유의 장치가 되고 먹의 번짐과 획의 호흡은 시간과 몸의 기억을 환기한다. 그는 법을 지키되 법을 넘어서는 길을 택했다. 이때 전통은 과거의 표본이 아니라 현재의 제작 환경이 된다. 그의 ‘전서의 행의서사’는 전통을 소환하는 기술이 아니라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제작 방식을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전시는 작품과 더불어 습작과 노트, 아카이브를 배치해 과정의 층위를 드러낸다. 관람자는 결과물의 표면을 넘어 제작의 리듬과 사고의 흐름을 읽게 된다.
지역의 사례로 보편을 말하고 보편의 언어로 다시 지역에 응답하는 것. 이 균형이 확보될 때 지역성은 출발점이 되고 목적지는 동시대의 보편으로 확장된다. 〈길을 묻다, 길을 내다〉는 바로 그 균형을 전시장 안에서 구현한다.
예술행정은 지역문화, 정책은 문화향유
공공 미술관의 책무는 기획의 성실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접근성, 학습성, 지속성을 담보하는 제도 설계가 뒤따라야 한다. 이 지점에서 행정은 지역문화의 인프라이고 정책은 문화향유의 프로토콜이다. 전시는 이 두 축이 실제로 만나는 화면이다. 전시가 지역 자산을 보편 언어로 번역하고 보편의 독해를 지역의 생활권으로 되돌리는 과정이 곧 정책의 작동이다. 접근성은 물리적 동선이나 운영 시간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정보의 어휘와 해설의 깊이, 교육 연계, 디지털 접근 채널까지 포함한 경험 설계가 정책 품질을 결정한다.
공공 전시는 기획의 자율성과 행정의 공정성 사이에서 균형을 요구한다. 특정 미감이나 취향의 우열을 가르기보다 동시대 관람 환경에 맞는 해석의 폭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번 전시는 그 기준선을 안정적으로 제시한다. 지역성에 매몰되지 않고 지역의 사례를 통해 보편적 질문을 끌어내며 보편의 언어로 다시 지역 현실에 응답한다. 큐레이션의 판단과 행정의 결정을 분리하지 않고 한 화면에 배치할 때 공공 전시는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 경로는 도시의 문화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행정이 토양을 마련하고 정책이 경험을 설계할 때 전시는 시민의 생활권에서 작동하는 공공 서비스가 된다. 그때 예술은 도시의 정체성을 새로 쓰는 언어가 된다. 지역 미술관의 전시가 지역 정체성을 다지는 동시에 국가 문화정책의 현장 실험실이 될 수 있음을 이번 사례는 시사한다. 지역문화가 곧 국가문화의 뿌리라는 전제 아래 향유의 폭을 넓히는 제도 설계와 교육·디지털 연동이 후속될 때 공공 전시는 도시를 넘어 국가브랜드의 문화적 신뢰로 환류한다.
질문으로 열고 공감으로 잇는 전시
두 예술가의 언어는 다르지만 도달점은 같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다. 문우식의 색과 선은 사회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숙고하게 만들고 인영선의 획과 공백은 우리 안의 호흡을 되돌린다. 전시는 관람 행위를 해석 행위로 확장한다. 보고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이 머무는 시간으로 치환한다. 이것이 공공 미술관에서 가능한 최선의 결과다. 전시가 지역문화의 자산을 새로 정리하고 시민의 문화향유를 실질적으로 넓힌다면 그 자체로 정책의 당위가 된다. 정책은 텍스트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사회에 안착한다. 경험은 곧 향유다.
최경현 천안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지역을 넘어 한국 현대미술과 서예사의 중요한 지점을 되짚으며, 예술이 길을 묻고 또 길을 내는 행위임을 관람객과 함께 성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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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다, 길을 내다〉는 지역에서 출발해 보편으로 확장되는 공공 문화의 경로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질문으로 열고 공감으로 잇는 길. 오늘의 천안은 그 길 위에 서 있다. 전시장을 나서는 관람객이 무엇을 보았는지보다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자문한다면 이 전시는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글 = 이창근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 미디어아트 디렉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