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고통스럽다, 매우 고통스럽다. 액체 스프레이를 맞았다."
김정일의 장남이자 현재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살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2017년 2월13일, 알 수 없는 액체를 손에 묻히고 김정남에게 다가간 두 여성 그리고 그 배후엔 누가 있었을까.
◇김정남 앞뒤로 여성 2명 달려들어 얼굴 '문질'‥암살, 2.3초 만에 벌어졌다
2017년 2월13일 오전 9시.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경호원 대동 없이 혼자 나타났다. 그는 이날 오전 10시에 이륙하는 마카오행 항공편을 탑승하기 위해 셀프 탑승 수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신원 미상의 여성 2명이 김정남에게 다가가더니, 앞뒤로 그를 덮쳐 얼굴에 무언가를 문지르고 도망갔다. 소요된 시간은 단 2.3초였다.
공격을 받은 김정남은 고통을 호소하며 곧장 공항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 공항 의무실로 이동했고, 의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이후 김정남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고, 용의자 여성 두 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택시를 타고 도주했다.
◇김정남 살해에 이용된 신경작용제 'VX'…사린가스보다 100배 이상 독성
공항 도착 2시간 만에 사망한 김정남을 부검한 결과, 그의 각막과 피부에서는 치사량의 1.4배에 달하는 신경작용제 'VX'가 검출됐다.
VX는 1952년 영국 생화학자가 개발한 무색무취의 신경작용제로, 일본 신흥종교단체 '옴진리교'의 1995년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 때 사용된 사린가스보다 100배 이상의 독성을 발휘하는 화합 물질이다. 인체에 흡수될 경우 뇌와 중추신경계를 손상해 10여분 만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유엔(UN)은 1991년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통해 VX가스를 대량살상무기(WMD)로 분류했다.
김정남은 사건 당시 가방에 VX의 해독제인 '아트로핀' 12정이 든 약병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일각에서는 김정남이 생전 VX에 의한 암살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그리고 북한인 8명…포섭·운전·지시, 역할 나눠 움직였다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은 누구일까. 맨손에 VX를 바르고 김정남의 얼굴을 문지른 베트남 국적의 여성 도안 티 흐엉(이하 당시 29)과 인도네시아 국적 시티 아이샤(25)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인이었다.
김정남 암살이 발생한 지 나흘 만에 입을 연 말레이시아 경찰은 북한 여권을 소지한 인물, 리정철(47)이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며 체포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북한 용의자 4명 홍송학(33), 리재남(56), 리지현(33), 오종길(55)도 공개했다. 이들 4명은 모두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 입국하는 날짜를 예상한 듯 김정남보다 먼저 말레이시아에 차례대로 들어왔다.
이때 쿠알라룸푸르 교외에 살면서 위장 취업한 리정철이 이들 4명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등 잡무를 담당했다.
김정남 암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이는 리재남이었고, 아이샤와 흐엉에게 VX를 직접 발라주고 김정남을 공격하게 한 이들은 홍송학과 리지현으로 확인됐다. 그 사이 공항 내 호텔에서 체크아웃 절차를 밟은 인물은 오종길이었다.
김정남 살인이 벌어진 시각, 홍송학 등 4명은 사건 현장 인근 식당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바로 말레이시아를 떠났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자국에 체류 중인 3명의 북한 남성도 추가 용의자라고 지목했다. 홍송학 등 4명의 항공편을 준비한 북한 국영항공사인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 올해 초 쿠알라룸푸르 현지에서 아이샤를 포섭하는 데 관여한 리지우(30), 마지막으로는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이 포함됐다.
당시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2개 조로 구성된 지원조가 역할을 나눠 활동했다. 1조는 보위성 소속 이재남, 외무성 소속 리지현으로 흐엉을 포섭했고, 2조는 보위성 소속 오종길과 외무성 소속 홍성학으로 구성돼 아이샤를 포섭했다. 이들은 2개 조로 별도 활동하다가 2월13일 말레이시아에서 만나 암살을 감행했다.
그렇게 북한인 8명이 '김정남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떠올랐다.
◇"김정남 아닌 김철이 자연사했다"…북-말레이, 40년 관계에 금 갔다
김정남이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는 평양 출생 '김철'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여권이 발견됐다.
이와 관련 강철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는 사망자가 김정남이 아닌 북한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김철'이라며, 사인은 독살이 아닌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라고 주장했다.
김정남이라는 이름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말레이시아 경찰이 진짜 사인을 숨기기 위해 용의자를 조작했다고 수사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말레이시아 정부는 북한의 행태에 대해 "무례하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강 대사를 추방하고 북한과의 무비자 협정까지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북한은 자국 내에 있는 말레이시아인들에 대한 출국 금지를 통보했고, 말레이시아도 자국 내 북한인의 출국을 금지하는 '맞불'을 놓는 등 40여년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던 양국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양국은 김정남의 시신 인도와 사실상 북한에 억류된 말레이시아인 9명의 출국금지 해제 문제를 두고 협상을 벌인 끝에 2017년 3월30일 합의에 이르렀다.
이 과정 중 3월 초, 말레이시아 정부는 유일하게 검거된 리정철에 대한 조사에서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구금 14일 만에 증거 불충분 무혐의로 석방하고 북한으로 추방 조치했다.
뒤이어 합의에 따라 말레이시아에 남아있던 공작원 김욱일과 현광성이 북한으로 떠났고, 김정남의 시신도 북한에 인도되면서 사건은 미궁 속에 빠졌다.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다"…말레이서 처음 만나 2년 만에 석방된 여성들
남은 건 김정남 암살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서 2년간 재판받은 흐엉과 아이샤였다. 두 사람 모두 돈을 받고 몰래카메라 촬영 장난에 동의했다가 이번 사건에 휘말린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흐엉은 몰래카메라에 출연할 배우를 찾는다는 '미스터 와이'(리지현)의 제안에 매달 10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김정남 암살 두 달 전부터 7~8차례 예행연습을 했다.
사건 당일에도 몰래카메라 촬영이라는 미스터 와이의 말을 듣고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향했다고 밝힌 흐엉은 "예전 촬영 때처럼 미스터 와이가 손에 발라준 액체를 그가 지목한 남자(김정남) 얼굴에 묻혔다"고 했다.
아이샤 또한 2017년 1월 쿠알라룸푸르의 한 쇼핑몰에서 '제임스'(리지우)라는 인물을 만나 몰래카메라 촬영에 동의, 흐엉과 비슷한 예행연습을 하고 돈을 받았다.
흐엉과 아이샤는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만나 사건 발생 전까지 약 열흘 동안 쿠알라룸푸르 시내 곳곳에서 함께 연습했다.
2월13일, 두 사람은 '중요한 촬영이자 고용된 배우(김정남)에게 몰래카메라를 수행하면 된다'는 지시를 받은 뒤 손에 발라준 VX를 김정남의 얼굴에 문질러 범행에 가담하게 됐다.
범행 직후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뒤 공항을 빠져나간 흐엉은 이틀 뒤 출연료를 받으러 공항을 찾았다가 체포됐다. 흐엉은 손에 유독성 물질을 발라준 줄 몰랐다면서 "미스터 와이는 거짓말쟁이다. 나는 이용당했다"고 호소했다.
아이샤는 "경찰이 저한테 간첩이냐고, 공항에서 왜 그 남자를 죽였냐고 물었다.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경찰은 제가 북한 지도자의 형을 계획적으로 죽였다고 했는데, 깜짝 놀라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도 몰래카메라의 일부냐고 했다"며 억울해했다.
주요 용의자들이 모두 도피하거나 북한으로 떠난 상황에서 두 사람의 재판은 큰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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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9년 3월11일 말레이시아 검찰 당국은 아이샤에 대한 살인 혐의 입증을 포기, 공소를 취소하면서 그를 석방했다. 이어 같은 해 5월3일, 흐엉 역시 살인죄에서 상해죄로 감형되면서 석방됐다.
제공=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