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열풍과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가져온 지식과 내 지식의 경계

데스크 칼럼입력 :2023/02/08 13:49    수정: 2023/02/09 10:12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란 영화가 있다. 안정효 씨가 쓴 소설을 정지영 감독이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다양한 함의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는 ‘천재 작가’ 임병석이란 인물이 나온다. 

어린 시절 헐리우드 영화에 푹 빠져 살았던 병석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한다. 그런데 그가 쓴 시나리오가 대박을 친다. 주변에서 천재 작가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곧바로 임병석의 시나리오가 헐리우드 영화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표절 파문에 휘말린 천재 작가 임병석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특별할 것 없는 스토리다. 그런데 임병석이 자기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든 친구 윤명석 감독에게 하는 항변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난 널 속이려 한 게 아니다. 나도 내 자신에게 속았다. 모든 게 내 창작인 줄 알았다. 나 임병석이가 헐리우드 키드한테 속은 거다.”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한 장면.

■ 어디까지가 나의 고유한 생각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챗GPT 열풍을 보면서 케케묵은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떠올리게 됐다. 더 정확하게는, 자기가 쓴 아이디어가 ‘창작’인지 ‘어디선가 봤던 이야기’인지 헷갈리는 병석의 모습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챗GPT를 비롯한 대규모언어모델(LLM)은 인간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챗GPT를 써 본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있는 방대한 자료들 속에서 핵심을 잘 짚어내는 능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을 비롯한 많은 교육, 연구 기관들이 챗GPT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경고가 결코 호들갑은 아닌 것 같다. LLM 기술이 지금보다 좀 더 발전하게 될 경우엔 '지식의 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챗GPT가 똑똑해질수록 표절이나 무단 인용이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헐리우드 키드' 병석이 방대한 영화 지식 때문에 표절을 하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태빌리티AI 홈 페이지.

논문을 쓸 때 가장 피해야 할 것은 ‘표절’이다. 그런데 표절이란 게, 단순히 남의 글을 악의적으로 가져다 붙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때론 부주의로, 때론 병석처럼 ‘헷갈려서’ 남의 글을 자기 창작물로 착각하는 경우도 표절에 해당된다.

챗GPT 같은 LLM 모델들이 지식 생산에 본격 활용될 경우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다. 

이런 가운데 영국에서는 흥미로운 소송이 하나 제기됐다. 세계 최대 사진 판권 업체 게티이미지가 지난 주 생성 AI 스타트업 스태빌리티 AI를 제소했다. 자사 사진 이미지 1천200만 건을 무단 도용했다는 것이 소송 이유다. 사진 설명을 비롯해 각종 메타 데이터들을 허락 없이 긁어갔다는 것이다. 게티가 스태빌리티를 제소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두 회사 소송이 본격 진행되면 AI 시대 저작권 보호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것 같다. 저작권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던 AI 기술 처리 문제를 놓고 공방이 벌어질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챗GPT를 비롯한 LLM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방대한 자료를 학습하고 요약 정리하다 보면 저작권 침해나 표절 이슈가 계속 제기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 챗GPT는 정당하게 인용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할리우드 키드’ 임병석은 악의적으로 다른 저작자의 글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무의식 속에 남아 있던 ‘위대한 작품’을 자기 지식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임병석이 표절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겐 ‘원작 인용’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챗GPT 같은 LLM들은 이런 책무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창작이나 연구 작업에 활용될 경우 ‘임병석이 범했던 오류’를 피할 방법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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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 제기가 기술을 잘 모르는 ‘문송족’의 물색 없는 타박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AI가 생활 깊숙이 스며들수록 이 질문이 뇌리 속에서 맴도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오늘 아침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떠올린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