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네이버쇼핑·지마켓 등 이커머스 플랫폼이 국내 유통 업계에서 커다란 세를 갖췄음에도 여전히 많은 소비자들이 홈쇼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충동 구매’를 하고 싶게 만드는 가성비 좋은 상품 구성이 첫 번째, “그래도 믿고 사도 되겠지” 하는 ‘신뢰’ 때문 아닐까.
이 중 가성비는 가격 경쟁이 활발한 이커머스 기업들도 특정 시즌에 따라 전략적으로 마케팅비를 쏟아 부으면 금세 흉내낼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특정 기업에 갖게 되는 신뢰는 웬만한 돈으로, 또 단기간 투자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홈쇼핑만의 '진짜 보물’이다.
그런데 홈쇼핑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있다. 소비자들이 알게 모르게 점점 등을 돌리고 있다. 홈쇼핑의 진짜 위기는 매년 10% 가까이 치솟는 송출수수료 보다는, 점점 옅어지는 소비자 신뢰로 보인다.
생방송 특성상 한정된 시간에 판매고를 올려야 하는 쇼 호스트들의 도 넘은 멘트, 할 수 있다. 소비자들을 혹하게 만드는 과장된 표현이나, 가끔은 실수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다. 고의성만 없었다면 홈쇼핑사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재발을 방지를 약속하면 소비자는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다시 좋은 상품이 나오면 구매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몇 건의 사고는 홈쇼핑사의 근원적인 경쟁력을 퇴색시키기 충분하다. 지난 8월 현대홈쇼핑은 송편을 구매한 소비자들에게 송편 3종 구성 상품을 판매하면서, 특정 송편이 빠진 구성만 배송했다. 전체 약 6천 건 주문 중 무려 1천700여 건이 잘못 배송됐다. 잘못 배송했으면 다시 배송하면 될 일인데, 재배송 처리는 4건에 불과했다. 대신 포인트 적립(1천449건), 현금 지급(151건), 반품 처리(88건)를 진행했다. 한 고객은 재배송을 요청했지만 ‘재고 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는데, 현대홈쇼핑은 보란 듯 방송 5일 후 동일 구성 상품을 재판매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대홈쇼핑을 비롯해 NS홈쇼핑, KT알파 등은 식품 판매 방송에서 원산지를 잘못 안내했다. 현대홈쇼핑의 경우 중국산 고춧가루를 국내산으로 소개했고, NS홈쇼핑은 원양산 오징어를 국내산이라고 했다. KT알파 게스트는 갈비탕 원재료인 소갈비가 미국산과 호주산임에도 국내산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피해를 본 소비자들을 대신해 심의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사업자들을 따끔하게 혼 냈을까. 그러지 않았다. 대량의 오배송 건과 원산지 눈속임 건 모두 행정지도인 ‘권고’결정을 내렸다. 권고는 방송심의 관련 규정 위반 정도가 경미한 경우 내려지기 때문에 해당 방송사가 법적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즉, 재승인 심사 때 감점을 받지 않는다. 원산지를 속였음에도 방심위는 너그러이 이해했다.
방심위가 솜방망이 조처를 내린 이유는 단순하다. “협력사 실수여서”, “고의인 것 같지는 않아서”, “자막으로 잘못을 바로 잡아서”, “한 번 실수로 법정제재는 과해서” 등으로 요약된다. 잘못한 건 맞지만 여하튼 이런저런 이유로 좀 봐주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방심위는 네이버쇼핑, 쿠팡 같은 대형 이커머스 플랫폼에 밀리고, 마켓컬리나 오아시스마켓 같은 신선식품 새벽배송 업체에 위협을 느끼는 대기업 홈쇼핑사가 가여워서 그런 것일까. 또 매년 2조가 넘는 송출수수료를 지불하는 홈쇼핑사가 안쓰러워서, 몇 년에 한 번씩 정부 재승인을 받아야 하는 홈쇼핑의 억울함을 잘 알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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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심 많은 방심위의 봐주기 심의는 결국 홈쇼핑사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를 야금야금 갉아 먹게 만드는 독이 될 수 있다. 당장은 법적 불이익을 받지 않아 위기를 넘긴 것 같지만, 그만큼 소비자의 신뢰는 소리 없이 무너진다. 엄격한 잣대로 심의할 사안까지 대기업 유통사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봐주는 사이 그들의 본원적인 경쟁력을 잃게 한다는 걸 방심위는 모르는 걸까.
쿠팡에 로켓배송이 없다면, 네이버쇼핑에 편리한 결제와 쏠쏠한 적립 혜택이 없다면, 마켓컬리에 새벽배송이 없다면...그리고 홈쇼핑사에 소비자 신뢰가 없다면 결과는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