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낙태권 논쟁, 그리고 작지만 강한 언론 이야기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스카터스블로그'의 집중된 전문지식

데스크 칼럼입력 :2022/06/24 15:34    수정: 2022/06/25 16:0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2년 6월 28일. 전 미국인의 시선이 연방대법원으로 쏠렸다. 이날 ‘오바마케어’ 합헌 여부에 대한 연방대법원 판결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오바마케어는 미국 의료행정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정책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런만큼 취재 경쟁도 엄청났다. 내로라 하는 법조 담당 기자들이 현장으로 몰려 들었다.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같은 전통 강자들도 예외없이 속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오바마케어 보도경쟁’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 CNN과 폭스뉴스는 판결문을 잘못 해석했다. 성급하게 ‘오바마케어 위헌’이란 보도를 내놨다가, 뒤 늦게 수정하는 망신을 당했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미국 연방대법원 전문 뉴스 사이트 '스카터스블로그'

이날의 승자는 스카터스블로그(SCOTUSblog)란 중소 사이트였다. 변호사 두 명과 법조 출입기자 한 명으로 구성된 스타커스블로그는 뛰어난 법률지식과 발 빠른 분석 능력을 앞세워 판결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면서 오바마케어 보도경쟁을 주도했다. 

미국 언론학자 미첼 스티븐스는 ‘스카터스블로그’를 미래 저널리즘의 모범 사례로 꼽기도 했다. 스티븐스는 단순 사실 전달을 넘어선 분석과 해석이 미래 저널리즘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스타커스블로그가 오바마케어 보도 때 보여준 모습은 ‘전문지식을 기반으로 한 깊이 있는 보도’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 낙태권 보장한 '로 대 웨이드' 위헌판결 앞두고 관심 집중 

요즘 스타커스블로그에 또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에 게류된 사건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은 6월 들어 미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인 총기 소유와 낙태 문제에 대한 판결을 앞두고 있다. 두 주제는 미국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꼽힌다.

중요한 사건에 대한 결과가 궁금한 독자들이 스카터스블로그를 찾으면서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CNN에 따르면 6월 들어 스카터스블로그의 트래픽은 최근 5년 동안의 같은 기간 트래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수시로 사이트 접속 장애가 발생하고 있다.

두 쟁점 중 총기 소유 관련 판결은 23일(현지시간)에 나왔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날 권총 소지를 엄격하게 제한한 뉴욕주 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하면서 보수의 손을 들어줬다.

총기 소유는 미국 수정헌법 2조가 보장하고 있는 중요한 권리다. 그런만큼 미국 보수진영에서는 절대 사수하려는 가치다. 

(사진=미국 연방대법원)

하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지금 총기 문제보다 더 큰 쟁점이 걸려 있다.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사건’ 판례를 둘러싼 공방이다.

‘로 대 웨이드’ 판례는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상 권리로 보장한 기념비적인 판결이다. 이 판례에 따라 미국에서는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 가능한 임신 24주 이전에는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5월초 이 판례를 뒤집기로 한 98쪽 짜리 다수 의견 판결문 초안이 공개되면서 미국 사회가 엄청난 논란에 휘말렸다.

미국 연방대법원 회기는 6월말 종료된다. 그런다음 9월까지 3개월 동안 긴 여름 휴가에 들어간 뒤 10월부터 새로운 회기가 시작된다. 그런만큼 이번 회기 종료 전에 ‘로 대 웨이드’ 판례에 대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로 대 웨이드 판례’ 번복 여부는 이 글이 다룰 주제는 아니다. 그건 법률 전문가들의 몫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연방대법원 뉴스 전문 사이트에 엄청난 트래픽이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뉴스’가 궁금한 독자들이 스카터스블로그를 계속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전문 분야를 '정확하게 명쾌하게 설명'한 것이 경쟁 포인트 

스카터스블로그는 변호사인 톰 골드스타인과 에이미 휴 부부가 2002년 창업했다. ‘오바마케어’ 보도 당시에는 법조 기자 58년 경력을 자랑하는 라일 데니스턴이 현장을 누볐다. 데니스턴은 2016년 은퇴했다.

지금도 스카터스블로그의 상근 직원은 5명이 채 안 된다. ‘작지만 강한 언론’의 전형이다.

미국 언론학자 미첼 스티븐스는 스카터스블로그의 강점으로 ‘집중된 전문지식(focused expertise)’ 을 꼽았다. 법률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첨예한 쟁점에 대해 탁월한 분석과 해석을 보여줬다.

CNN은 스카터스블로그의 강점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열광적인 팬심, 보기 드문 신뢰성, 그리고 광범위한 존경. 20년 동안 연방대법원이란 좁은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 ‘가장 믿을만한 뉴스’란 인식을 심어준 덕분이다.

이게 말은 쉽지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주독자층인 변호사와 로스쿨 학생들만으론 스카터스블로그를 둘러싼 열풍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 창업자인 에이미 휴는 CNN과 인터뷰에서 “지난 20년 동안 변호사, 로스쿨 학생 같은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설명했다.

스카터스블로그 공동 창업자인 톰 골드스타인과 에이미 휴.

연방대법원이란 제한된 전문분야를 다루는 스카터스블로그는 ‘정확하고 명쾌한 기사’를 통해 주독자층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낙태권 논쟁의 결말이 궁금한 미국인들은 스카터스블로그란 대법원 전문 뉴스 사이트를 지속적으로 찾고 있다는 소식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들이 오랜 기간 정도를 지키면서 쌓아올린 신뢰와 전문성이 부럽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똑 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 나는, 그리고 우리 언론은, 독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오늘따라 ‘작지만 강한’ 스카터스블로그가 거대한 산처럼 내 앞에 우뚝 선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자조적으로,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 서문의 마지막 문장을 또 다시 되뇌이게 된다.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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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결국 이 글을 쓰고 하룻밤 지난 사이에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다. 당분간 미국 사회는 '낙태권'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게 진행될 것 같다. 덕분에 스카터스블로그는 이번 판결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독자들로 더 붐빌 것으로 예상된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