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세계 각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암호화폐가 이런 제재 사각지대로 기능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미국, 유럽연합(EU) 등 경제 제재를 조치한 서방권에서는 암호화폐 생태계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케 하려고 있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강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대러시아 경제 제재 효과가 일부 저하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6일 월스트리트저널,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EU는 러시아에 적용되는 경제 제재 범위에 암호화폐를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앞서 미국과 EU는 200개 이상 국가 1만1천개 금융기관의 결제를 지원하는 시스템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스위프트)에서 러시아 은행을 제외하는 등 다방면으로 경제 제재를 적용했다. 이런 제재는 즉각적으로 러시아 경제에 타격을 입혀 달러 대비 러시아 루블 시세가 30% 가량 폭락,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암호화폐로 이런 제재를 우회하려 한다는 분석이 제기되면서 대응책을 고민 중인 것이다. 러시아가 최근 암호화폐 투자 규제를 완화한 점, 루블 기반 암호화폐 매수세가 급증한 점 등이 이런 분석에 힘을 더욱 실었다.
암호화폐 특성상 각국 당국이 금융거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고, 거래자 신원 확인이 어렵기에 이런 행보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미국 전 재무부 차관인 스튜어트 레비는 지난 25일 미국 정치 매체 폴리티코를 통해 이런 의견을 제시하면서 암호화폐를 통한 경제 제재 우회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난달 27일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가 트위터를 통해 암호화폐 거래소들에게 러시아인 소유 지갑 주소를 동결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거래소 대응을 보면 국내외 차이가 있다. 은행과 실명계좌 제휴를 맺은 국내 거래소인 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고팍스 등은 국제 경제 제재 흐름에 동참해 러시아인 소유 계좌를 동결한다고 밝혔다.
반면 코인베이스, 바이낸스 등 해외 거래소들은 러시아인 소유 계정을 차단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용자 개개인의 거래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코인베이스 최고경영자(CEO)인 브라이언 암스트롱은 트위터를 통해 "법적 규정이 없는 한 모든 이용자가 기본적으로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바이낸스도 지난 5일 자사 블로그에 이에 대한 입장문을 올렸다. 해당 게시글에서 회사는 "기업, 플랫폼이 평범한 러시아 시민의 자산을 동결하는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며 "특정 국가와 국민에 반대되는 입장이란 이유로 은행 CEO가 일방적으로 자산 동결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면, 그 대상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요구사항이 국제적 합의에 따라 마련될 경우 따를 의향이 있지만, 선제적으로 러시아의 거래소 이용을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국내외 거래소 간 이런 입장차가 나타나는 이유는 적용받는 규제 강도와 관련이 있다. 국내 거래소의 경우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에 따른 강력한 규제를 받고 있다. 사업자는 각종 요건을 충족해 금융정보분석원(FIU)를 통해 신고수리를 받아야 영업이 가능하다. 원화거래는 은행과 제휴 계약을 맺어 실명계좌를 확보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FIU와 은행으로부터 검증을 받아야 사실상 사업이 가능한 구조다.
해외 거래소의 경우 이처럼 강력한 수준의 규제를 적용받고 있지 않다. 거래 서비스를 위해 국내 사업자와 마찬가지로 은행과 제휴할 필요는 있지만, 특정 은행이 아닌 다양한 은행과 제휴가 맺어져 있고, 실명계좌로 서비스가 제한되지 않는 등 서비스를 재량적으로 운영할 여지가 더 큰 것이다.
정석문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해외 거래소의 경우 사실상 '벌집계좌(거래소 법인계좌를 통해 고객 자금을 유통하는 형식)'를 사용하는 것으로 안다"며 "적어도 은행과 제휴를 맺은 기간 동안 거래소 재량이 국내 거래소보다는 크기 때문에 러시아 경제 제재와 관련해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향후 글로벌 차원에서 암호화폐를 통한 경제 우회를 원천 차단할 방책은 없다는 것이 업계 관측이다. 코인베이스, 바이낸스 등 거래소는 글로벌 제재안이 마련되면 이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으나, 이에 반대하는 거래소가 등장할 경우 제재안 수용을 의무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암호화폐를 제재 우회 수단으로 악용하더라도 그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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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낸스는 러시아 계정을 정지하지 않은 또다른 이유로 이 점을 들었다. 전세계 인구의 3% 미만이 암호화폐를 소유하고 있고, 암호화폐 소유자들이 전체 순 자산의 약 10% 정도만 암호화폐로 보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즉 경제 제재 우회를 노릴 만큼 암호화폐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또 루블에서 암호화폐로 국가 통화를 전환할 경우 루블 가치가 더욱 하락하면서 국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이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봤다.
미국 격월간지 포린폴리시도 지난 3일 비슷한 전망과 함께 "북한이 암호화폐를 경제 제재 우회 차원에서 사용한 사실이 있지만, 러시아는 북한보다 규모가 큰 국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