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는 인류가 기술로 확보한 새로운 시공간이다. 그곳을 유익하거나 재미있는 내용물로 채워 이용자 시간을 점유하기 위한 기업간 전쟁이 시작됐다. 그 한편에서는 그곳을 놀이터 삼아 놀면서 돈까지 버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일과 놀이의 결합. 새로운 경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메타버스에서 새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들의 일상을 엿보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편집자주]
열일곱. 한국에선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 갓 중학교를 졸업한 미성년이지만, 수많은 고민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이들을 왕왕 엄습한다. 객쩍은 상상이 번뜩이는 창의성으로 진화하는 행운을 맞기도, 간혹 불안감이 삽시간 내면에 퍼져 감정이 요동치기도 한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내적 불균형에서 평정심이 생기는 때가 바로 열일곱이다.
정신없기로만 따지면 일생에서 가장 분주하다. 일찌감치 적성을 찾아 장래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학생들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선택에 애를 먹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이호(가명)도 그랬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과 소통하는 게 좋았고 그래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꿈꿨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메타버스를 접했다. ‘친구들이랑 뭐 할 거 있나’ 생각하면서, 우연히 네이버제트가 운영하는 제페토에 접속했다. 이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음성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이호는 금세 제페토에 빠졌다. 교우관계가 원만했던 이호에게 제페토는 또 다른 세상이자,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제페토를 두고 ‘재미없다’, ‘메타버스와 거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 생각은 전혀 달라요. 편의점 방문, 백화점 쇼핑 등이 제페토에서 가능합니다. 물론, 우리는 제페토에서 구매한 컵라면을 먹으며 포만감을 느낄 순 없어요. 얼굴에 스치는 바람도 체감할 순 없죠. 제페토에서 이런 거 빼곤 다 돼요. 이것만으로도 매력적이죠.”
이호는 제페토에서 아바타를 꾸미며, 메타버스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제페토 내 한 메타버스 크리에이터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제페토를 토대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데 이호의 아바타가 배역에 적합하다고 판단, 이호에게 출연을 요청했다. 이호는 흔쾌히 승낙했다. 현실 세계와 비교하면, 이른바 ‘길거리 캐스팅’으로 드라마에 합류한 격이다.
막연히 유튜버를 꿈꿔온 소녀가 메타버스에 흥미를 느끼다, 어느덧 메타버스 속 드라마에서 연기까지 경험하게 됐다. 무대에 서는 데 그치지 않았다. 드라마 출연 후, 이호는 직접 드라마 이야기를 만들어 콘텐츠로 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배우로 시작해, 작가 겸 제작자로 거듭나겠다고 마음먹었다.
“드라마 제작이나 이야기 작가요? 처음엔 전혀 관심 없었죠. 출연하다 보니 흥미가 생겼어요. 우선 ‘블로(VLLO)’라는 동영상 편집 앱을 켜고 만지작거렸어요. (웃음) 초보자도 활용하기 쉬운 앱이었어요. 팬들 덕분에 (드라마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꾸준히 만드는 게’ 어려울 뿐이죠.”
2019년 말 이호는 유튜브 계정을 만들었다. 어느새 구독자는 1만명을 웃돌며, 게재한 영상은 100개에 달한다. 30만 조회수를 기록한 드라마도 있다. 2년 동안 누적 조회수는 300만회가량. 열일곱 이호가 일궈낸 성과다. 10대 구독자가 대부분이라, 드라마 내용도 중고등학생을 초점으로 다룬다고 한다.
‘남사친이 남친이 되는 순간’, ‘나의 마음, 너의 마음’, ‘설레는 시간’, ‘너의 운명’, ‘학생회장을 좋아해 버렸다’ 등 드라마 제목만 봐도, 10대들이 좋아할 일상, 연애 등을 주 소재로 한다. 출연진 섭외 방법은 각양각색. 제페토와 유튜브에서 전체 공고하거나 이호가 직접 섭외에 나서 어울리는 아바타를 찾기도, 혹은 출연을 원하는 사람이 이호에게 별도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10대 학생들이 좋아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들을 드라마로 구현해요. 학교에서 겉으론 굉장히 불량해 보이는 학생이 있어요. 접근하기 어렵죠. 그런데 이 학생, 알고 보니 착하고 따듯한 성격을 지녔어요. 반전입니다. 이 학생과 친해지는 과정이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메타버스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요."
제페토에서 아바타(드라마 출연자) 동작 하나하나를 포착하고, 얼굴 감정선을 그려낸다. 배경은 제페토에서 무료로 제공받는다. 드라마 이야기는 모두 이호가 직접 구성해낸다. 이호 드라마 한편은 보통 3~4분. 3분짜리 하나를 제작하는 데 평균 5시간 소요된다. 예비고1이 된 후 시간이 다소 빠듯하지만, 팬들 응원에 힘을 얻는다고 한다.
제페토 외 다른 메타버스 플랫폼도 접해봤다. 단, 배우 얼굴 윤곽이나 눈썹, 입술 모양 등을 세밀히 조절해 드라마에 어울리는 주연 배우를 그리기엔 제페토만 한 게 없다고 이호는 말한다. 물론, 제페토에서 다채로운 표정과 움직임이 곁들여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최근엔 여러 제페토 크리에이터와 협업도 계획 중이라고 이호는 설명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부모님은 좀 더 공부에 집중하길 바라세요. 공부도 당연히 열심히 해야겠죠. 동시에 매일같이 열중하는 지금 일에 좀 더 힘을 주고 싶기도 해요. 방송이라든지, 게임 등 다른 영역과 접목할 만한 방법 등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제페토 아바타가 입을 만한 옷을 만드는 등 패션 디자인도 공부할 예정입니다.”
전 세계 3억명가량이 제페토를 이용하고 있다. 국내에선 ‘MZ세대 놀이터’로 불린다. 이호는 제페토 이용자와 드라마 팬들, 유튜브 구독자 등으로부터 종종 메시지를 받는다. 공통으로 감사하다는 표현이다. 이호 드라마에 출연한 한 제페토 이용자는 이호 덕분에 메타버스에 관심이 생겼고, 관련해 꿈을 찾았다고도 한다.
"(부모님께) 처음엔 비밀로 했어요. 그러다 구독자수와 드라마 조회수가 점차 늘자, 말씀드렸어요.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이었죠. 그런데, 수익이 난 뒤부터 달라졌어요. (웃음) 공부와 병행한다는 조건으로, 제 꿈을 지지해주길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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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과 연애를 넘어, 스릴러 장르를 눈여겨보고 있다. 나이가 들면, 직장 생활도 다뤄볼 참이다. 때론 아이디어가 고갈돼 난항을 겪지만, 메타버스 세상 속 드라마 이야기를 창작하고 제작하는 건 이호에게 있어 아직까지 가장 행복한 일이다.
"혹자가 국내 제페토, 메타버스 드라마 제작자 중 으뜸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이호'를 떠올리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제페토에서 그간 쌓아온 역량을 바탕으로, 향후 진로도 구체화할 예정입니다. 저는 제페토로 이전과 다른 삶을 살 게 됐어요. 성장한 거죠. 이처럼 메타버스에서 여러 사람이 꿈을 찾고 성장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