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난, 진짜로 10~20년 지속될까

[이슈진단+] 가열되는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 경쟁

반도체ㆍ디스플레이입력 :2022/02/16 09:19    수정: 2022/02/17 10:34

“2030년에 인터넷 연결기기가 2020년보다 10배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10~20년 뒤에도 반도체가 여전히 부족할 수 있다.”(피터 베닝크 ASML 회장)

피터 베닝크 회장의 발언이 좀 과하다 하더라도 반도체 공급난이 국내외 산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도체가 부족해 차와 스마트폰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국내외 할 것 없이 반도체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이 컸다. 코로나19 때문에 재택·원격근무가 늘면서 컴퓨터·가전 수요가 폭발하고 인터넷 회사들도 서버를 대거 늘리고 있다.

문제는 공급난이 쉽게 단기간에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요를 맞추려면 공급을 늘려야 하지만 반도체 산업 특성상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국가와 대륙별로 반도체를 무기로 삼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사진=삼성전자)

■ “20년 뒤에도 반도체 부족”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ASML의 피터 베닝크 회장은 지난주 온라인으로 열린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코리아’에서 “10~20년 뒤에도 반도체가 부족할 수 있다”며 “수요가 더 많다”고 말했다. 베닝크 회장은 “2020년 인터넷으로 연결된 기기는 400억대였지만 2030년 3천500억대로 늘 것”이라며 “10년 만에 10배 가까이 되는 셈”이라고 추정했다. 한편에서는 ‘장비 많이 팔려는 수작 아니냐’고 지적하지만, 정도가 다를 뿐 반도체 공급이 달린다는 데 이견이 없다.

ASML은 반도체 업계에서 을의 입장이지만 갑보다 힘이 세다는 뜻에서 ‘슈퍼 을’로 불린다. 반도체 미세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독점한다. EUV 노광 장비를 1년에 45대 안팎으로 한정 생산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물론이고 미국 인텔과 대만 TSMC도 장비 사려고 줄 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터 베닝크 ASML 회장이 9일 온라인으로 열린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코리아’에서 발표하고 있다.(사진=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

미국 투자은행(IB) JP모건이 최근 개최한 기술·자동차 포럼에서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 글로벌파운드리의 톰 콜필드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공급난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며 “시설을 확장하는 데 시간 걸리기 때문에 공급난이 2년 안에 풀리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전력 반도체 회사 온세미의 하세인 엘쿠리 CEO 또한 “올해 내내 수요가 공급보다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반도체 공급망 정보 요청서(RFI)를 분석한 결과 반도체 공급망이 여전히 취약하다고 봤다. 주요 반도체 생산 설비가 90% 이상 가동 중이라며 새로운 시설을 짓지 않고는 공급에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반도체 수요 회사가 가진 평균 재고량은 지난해 5일치도 안 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40일치에서 크게 줄었다. 상무부는 지난해 9월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에  최근 3년간 매출과 고객 정보, 주문·판매·재고 현황 등을 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민감한 고객 정보 빼고 자료를 냈다.

(사진=NXP반도체)

■ 반도체 없어 차 1000만대 못 만들어

반도체가 부족해 타격을 입은 대표적인 산업은 자동차다. 차량용 반도체가 부족해 자동차 제조사는 계획한 만큼 차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지난해 국내외 자동차 생산량이 1천130만9천400대 줄었다.

조성환 현대모비스 사장은 세미콘코리아에서 “자동차 업계가 반도체 수요를 잘못 예측해 지난해 국내외 자동차 생산량이 1천만대 넘게 줄었다”며 “반도체가 얼마나 필요한지, 언제 자동차 산업이 회복할지 업계가 잘못 계산했다”고 털어놨다.

신차를 계약하고도 출고까지 1년을 기다리는 소비자가 부지기수다. 제동·조향·전동화 장치와 첨단운전자지원시스템(ADAS), 에어백 같은 안전 장치, 인포테인먼트를 비롯한 편의 장치, 발광다이오드(LED) 램프 등에 시스템 반도체가 들어간다. 전자 제품의 두뇌 역할을 하는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고성능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이 쓰인다.

삼성전자·TSMC 등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 가동률이 100%에 이르렀고 생산 단가가 비싸졌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파운드리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통 큰 투자를 결정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에서 두번째)이 지난해 1월 평택캠퍼스 3공장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는 기흥·화성캠퍼스와 평택캠퍼스에 더해 미국 오스틴·테일러를 잇는 시스템 반도체 삼각편대를 구축한다. 20조원(170억 달러)을 들여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제2공장을 짓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9년 4월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내놓으며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확실히 1등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생산·연구개발(R&D)에 133조원 투자해 세계 1위 파운드리 회사 TSMC를 넘어서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50% 넘게 차지하는 TSMC는 역대 가장 많은 52조원(440억 달러)을 올해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14조원(120억 달러)을 들여 미국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일본에서도 8조원(70억 달러)을 투입해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한다.

인텔 역시 파운드리 사업을 다시 하겠다며 24조원(200억 달러)으로 미국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 공장 2개를 짓기로 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도 24조원(200억 달러)을 투입해 파운드리 생산 라인을 2개 갖추기로 했다. 1조원(10억 달러) 규모 파운드리 펀드도 꾸렸다.

중국에서 가장 큰 파운드리 업체 중신궈지(SMIC)는 올해 6조원(50억 달러)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투자액 5조원(45억 달러)보다 많은 사상 최대 규모다. 중국 베이징·상하이·선전에 새로운 공장을 짓기로 했다. 새 공장이 지어지면 반도체 생산 능력이 8인치 반도체 기판(Wafer·웨이퍼) 기준 현재 월 13만개에서 15만개로 늘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SMIC는 미국 무역 블랙리스트(Entity List)에 올랐다. 엔티티 리스트는 미국 상무부가 미국으로의 수출을 제한하는 명단이다. 상무부는 어떤 기술·상품이 국가 안보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수출을 제한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열린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화상 회의에 참석해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있다.(사진=AP=뉴시스)

■ 공급망 주도권 경쟁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려는 투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주요국은 저마다 ‘우리나라에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 상무부는 미국에서의 반도체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로나19와 자연 재해, 정치 불안 등으로 외국에서 반도체 설비가 멈추면 미국 제조 시설도 문 닫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반도체 공급망이 여전히 취약하다”며 “국내 생산 역량을 키우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달 초 미국 연방의회 하원은 ‘미국경쟁법안(America COMPETES Act)’을 통과했다.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는 데 63조원(520억 달러)을 쓴다. 하원에 앞서 상원은 지난해 6월 ‘미국 혁신과 경쟁법(USICA·U.S. Innovation and Competition Act)’을 가결했다.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들라’면서 300조원(2천500억 달러)을 쏟아 붓는다.

미국에 맞선 중국도 반도체 공급망을 잡겠다고 나섰다. 2025년까지 중국에서 쓰는 반도체의 70%를 국산으로 조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칭화유니그룹 반도체 공장을 찾아 “반도체는 제조업의 심장”이라며 “심장이 약하면 아무리 덩치가 커도 강해질 수 없다”고 언급했다. 지난해 중국 반도체 자급률은 20%가 안 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연합(EU)은 ‘집적회로법(Chips Act·반도체법)’으로 독립을 꾀한다. 유럽은 반도체를 개발하더라도 아시아에 생산을 맡겨왔다. 새로운 법을 만들어 58조원(480억 달러) 투자하기로 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8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집적회로는 세계 기술 경쟁의 중심”이라고 평가했다.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코로나19가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며 “공장이 문을 닫아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다”고 토로했다.

TSMC 공장을 유치한 일본을 포함해 다른 나라도 반도체 공급망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일본은 자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짓거나 증설하면 투자액 절반을 정부가 대기로 했다.

전보희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미국과 중국이 첨단 기술을 둘러싸고 패권을 다툰다”며 “코로나19 사태로 보호무역주의가 심해지면서 국가별 각자도생 산업 정책이 추진된다”고 설명했다. 전 수석연구원은 “주력 산업에 필수인 원자재 공급망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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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왼쪽 세번째)이 2019년 4월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에서 열린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세계 최초 극자외선(EUV) 공정 7나노로 출하된 반도체 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맨 왼쪽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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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14일 청와대에서 제4차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열고 ‘경제 안보를 위한 공급망 관리 기본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특정 나라에 50% 이상 수입을 의존하는 품목 등 4천개에 조기경보시스템(EWS)을 적용한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마그네슘·텅스텐 등 200개 경제 안보 핵심 품목도 지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