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시대 주도할 인간의 세 가지 특질

[이균성의 溫技] 이야기와 놀이 그리고 기술

데스크 칼럼입력 :2021/11/24 11:46    수정: 2021/11/24 12:19

인간이 과거에 구축한 가장 광범위한 메타버스 세계는 아마도 ‘기독교적 세계관’일 것이다. 그 다음이 ‘공산주의 체제’가 아닐까 한다. 메타버스 세계에 대해 ‘인간이 현실과 완전하게 분리되지는 않게 창조한 가상세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는 인간이 과거부터 한 종류의 균일한 특질의 세계가 아니라 최소 두 종류 이상의 서로 다른 세계를 오가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천국으로 압축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굳이 메타버스를 갖다 붙인 까닭은 향후 전개될 메타버스 시대가 얼마나 웅장한 것일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현실의 인간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고 재배치하는데 메타버스가 끼칠 영향이 그만큼 클 수 있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다. 대전환이라고 해도 좋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메타버스(이미지투데이)

시대가 크게 변하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공산주의는 더 이상 감동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반전도 새로움도 없는 뻔한 스토리가 되고 말았다.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아는 게 세상을 살고 즐거움을 느끼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관심 없는 것을 지속적으로 읊조리는 것은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다.

이 지점에서 메타버스 시대를 주도할 새로운 유형의 인간들이 나타나고 있다. 시대가 변하기를 바라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를 원한다면 이 새로운 인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과거의 인류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산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과거의 인류가 종교와 정치의 시대를 살았다면 앞으로 메타버스 인류는 설화(說話)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거가 ‘진리(眞理)의 시대’였다면 메타버스가 열어갈 미래는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의 시대’가 될 듯하다. 과거에도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천국을 창조하기도 했고 평등사회 설계도를 그려내기도 했으며 지상낙원을 그린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소수가 그 이야기를 고안하고 나머지가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는 모두가 같은 드라마다.

메타버스 시대가 그 이전 시대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소수가 아니라 원하는 모든 사람이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그 이야기는 좁은 의미의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정확하게는 ‘맥락이 있는 생활의 공간’이라고 보는 게 옳다. 삶이 있고 그것이 의미 있게 유지되는 환경을 말한다. 그 환경은 필요에 따라 현실과 연결되기도 하고 현실과 단절될 수도 있다.

기업이 메타버스 서비스를 한다는 것은 이용자와 더불어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를 짓는 사이버 공간을 마련하고 넓혀간다는 의미다. 기업의 성패는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를 짓는 이용자를 얼마나 신나게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용자는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를 통해 돈을 벌고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새 시대는 진리의 추종자보다 거짓에 눈 밝은 자가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는 진리에 대한 추종보다는 진리를 뒤틀고 전복시킬 때 더 재밌다. 진리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다는 뜻이다. 메타버스 시대가 이전의 시대와 다른 또 하나의 큰 차이도 여기서 비롯된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주로 인간을 위한 편리(便利)의 향상에 복무해왔다. 편리를 위한 수단과 도구를 발전시켜온 게 과학기술의 역사였다.

과학기술의 편리에 대한 복무는 그러나 이제 종교나 정치처럼 뻔한 스토리로 전락하고 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생산성의 고도화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고 남는 상황에 도달했거나 거의 도달 직전이라고 보는 게 옳다. 과학기술은 이제 새 용처를 찾고 있고 그게 재미(놀이)다. 메타버스는 그 필요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새 시대는 잘 외우는 자보다 잘 놀고 즐기는 자가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종교나 정치는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를 말(언어)로 짓는다. 그것만으로도 거의 충분하다. 하지만 메타버스 시대의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말만으로 짓는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고 그래서 반복될수록 아무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메타버스 시대에는 새로운 언어가 덧붙여져야 한다. 그게 곧 기술이다. 기술로 짓는 ‘거짓 이야기’가 메타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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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시대의 새로운 인류의 세 번째 특질이 바로 기술인 것이다. 모두가 엔지니어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기술에 대해서 이해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를 모르고 이야기를 지을 수 없는 것처럼 메타버스 시대에는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천하의 이야기꾼이라도 진부한 스토리를 반복하는 녹음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시대가 교체되고 있고 그런  장면이 속출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헛소리로 여길 사람이 많을 줄 안다. 항상 그랬다. 우리는 살아보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을 땐 외면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인류가 등장하고 있다. 10대를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거짓, 그러므로 이야기’의 시대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알려줄 것도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펼쳐갈 이야기 세상을 훼방 놓지는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