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은 공포이며,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
괴기스러운 ‘크툴루’ 환타지 세계의 창시자인 소설가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말이다. 그의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다가올 일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면 무서움이 덜하다는 뜻과 통한다.
‘예측 가능성’은 철길을 따라 가듯 현재의 일이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는 ‘선형적 믿음’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맥락상 선형적이다. 관성과 중력이 통하고, 힘을 가하면 구부러지거나 늘어난다. ‘뉴턴의 법칙’과 같은 물리학 공식으로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다.
이론을 만들어 내는 연구방법인 연역법과 귀납법도 선형적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독립변수의 변화에 따른 종속변수의 추이를 예측하는 회귀분석도 선형적인 미래 예측법의 하나이다. 축적된 데이터로서 미래를 예측하는 인공지능과 기계학습 역시 과거의 패턴이 미래에도 높은 확률로 계속될 것이라는 선형적 믿음에 기반한다. 러브크래프트의 통찰과 같이, 인류는 선형적인 가정에 기반한 예측 이론으로 미지의 공포를 극복해 왔다.
그러므로 공포는 불연속을 대면할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현재가 뻗어져 나간 경로 상에 있는 미래를 그려보지만, 기대와는 아주 딴판인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면 두려움을 느낀다. 기울어진 방향을 서서히 바꾸는 곡선은 직선은 아니지만 선을 따라가니 맥락상 선형적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거나 갑자기 끊어져 버린 기차길처럼, 원인과 궤적을 추적할 수 없는 불연속의 미래는 선형적이지 않다. 불연속의 사건은 도대체 가늠이 안되고 계산할 수 없으니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공포 영화에서는 불연속의 시간과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방금 죽었는데 부활한 좀비, 괴수로 변하는 사람,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림자,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 순식간에 나를 덮치는 장면 속에서 관객들은 놀라 까무러치고 괴성을 지른다. 예측하지 못한 사물을 대면하니 무섭고 두렵지만, 그래도 영화가 허구라는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으니 스릴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에 현실의 세계에서 불연속은 재미가 아닌 불편함과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멈추어 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딛는 순간, 당신은 어색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내 몸이 아주 잘 적응했기 때문에 생긴다. 에스컬레이터가 평소처럼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니 몸이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선형적 세계에서 비선형적 세계로 이동하는 일이 이와 같다.
그러나 일단 다른 세계에 진입하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일들이 점차로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미래를 선형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과 같다. 생뚱맞았던 불편함의 時空이 하루하루 익숙해지는 時空이 된다. 이러한 학습과 적응의 가변적 시공간을 혹자는 薄明의 시공(Twilight zone)이라 부른다.
박명의 시공은 불편한 혼돈과 적응이 공존하는 시공이다. 태양이 비추어 사물을 명확하게 보이는 낯 시간도,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지척을 알 수 없는 한밤중도 아닌 안개속과 같은 어중간한 틈새 시공간이다. 다가오는 동물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어슴푸레한 땅거미의 시간이다. 이렇게 피아 구별이 어려운 박명의 시공간, 선형과 비선형이 공존하는 시공을 IT기술이 창조했다. 바로 메타버스(Metaverse, 초우주)이다. 메타버스라는 말은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Snowcrash(1922)라는 SF소설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세계 굴지의 IT 기업들이 메타버스를 미래의 먹거리 사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기업이 경쟁적으로 엄청난 기술투자를 한다면 영화 ‘Ready Play One’의 가상 우주가 한 세대 다음에 진짜로 실현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컴퓨팅 파워가 만드는 저해상도 가상공간은 사람의 오감을 속일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발전하는 영상 처리능력이 우리의 감각을 완전하게 속일 싱귤래리티(singularity, 특이점)의 가상공간을 언젠가는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메타버스의 기술이 궁극에 다다르게 된다면 ‘먹는 것, 자는 것, 배설하는 것’ 외에는 우리의 오감을 완전히 속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루에도 서너 시간씩 인터넷에 연결되어 생활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후손은 메타버스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낼 가능성은 아주 높다.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제2의 생을 메타버스가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타버스 세상에서 꿈꾸던 인생을 살아가고, 가상 자산을 획득하고 축적하며 커뮤니티 안에서 대인 관계를 넓혀갈 것이다. 신뢰할 경제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그곳에 투입한 가상자본의 교환가치가 갈수록 증대할 것이다. 그 결과 메타버스의 지속가능성이 나날이 탄탄해질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메타버스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마음대로 바뀌고, 공간도 순식간에 바뀐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아바타로 살아간다. 덕분에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제2의 인생을 원하는 모습으로 대신 살아갈 수 있다. 2개의 언어를 배우는 젓먹이의 혼돈처럼, 메타버스가 만들 시공간은 삶의 경계가 모호한 박명의 시공이다. 그런 메타버스의 세계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는 ‘We can do that’ 이라는 이태리 영화가 적절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이태리는 1978년 전국의 모든 정신병원을 폐지하는 바실리아법을 통과시킨다. 정신과 의사인 바실리아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이 법의 영향으로 정신병자를 커뮤니티로부터 격리시키던 전국의 정신병원은 점차로 축소되어 1998년 완전히 사라졌다.
영화에서는 정신병동의 감방에서 나와 갈 곳이 없어진 정신병자들을 혁신적 리더가 협동조합의 주인(조합원)으로 초대한다. 아무도 안될 것이라는 주변의 의구심 속에서, 그들은 좌충우돌하면서 ‘감방이 없다’는 뜻의 ‘논첼로(Noncello)’ 라 불리는 협동조합을 성공적으로 가꾸어 간다. 기억과 정신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는 정신병 환자들이 말이다. 이영화는 엄청난 담론의 소재가 되지만, 소수자를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인간 정체성의 답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정신병자는 어떤 의미에서 경계의 세계인 박명의 시공을 넘나드는 사람이다. 어슴푸레한 틈새의 정신 세계에 갇혀 있던 그들의 이야기에서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절대명제는 미친 사람에게는 들어 맞지 않는다. 우리의 오감을 속여 기억과 정신의 眞僞가 오락가락하는 메타버스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개의 우리는 선형적인 세상에서 자신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다. 사람마다 소속된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공유된 경험과 보편적 가치관이 통하는 세상이니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어느 순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롯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한다면, 당신은 박명의 시공에 진입했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메타버스와 같은 박명의 시공에서 아바타로 살아가는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도 어렵고, 상대가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기도 힘들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가상세계에서 사람은 자신이 설정한 아바타의 외양에 따라 행동을 한다고 한다. 현실에서는 점잖던 사람도, 자신을 악당 아바타로 설정하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구 총질을 해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러한 메타버스 세계에서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잘 설명해 주는 귀한 사례가 있다. 바로 WoW 게임에서 2005년 9월에 벌어진 “오염된 피(corrupted blood)”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개발자가 악의 없이 만든 무증상 전염병과 관련된다. 무증상 팬데믹에 감염된 게이머들과 NPC(non-player character)들이 텔리포트를 통해서 쉘터에 돌아와서 커뮤니티를 괴멸하게 만든 사태가 벌어졌다. 전염병에 노출된 아바타들의 행동은 각양각색이었다. 나만 죽기 억울하다고 주변에 마구 전염병을 전파했던 자, 다른 아바타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용한 곳에 자신을 격리했던 자 등, 아바타마다 서로 다른 유형의 행동패턴을 보여주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위적인 질병전파 연구가 불가능 하기에, 가상공간의 전염병 사건은 예방의학자들의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고호트별로 특정된 게이머 군집단의 행동패턴에 대한 무궁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팬데믹이 출현하면 어김없이 ‘오염된 피’의 스토리가 기사로 나오곤 한다. “Epidemiology(2007)와 corrupted blood”로 인터넷 검색하면, 이 사건에 대한 전염병학회지의 논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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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세상에서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고는 인간 관계를 쉽게 맺을 수 없다. 옆에 있는 아바타와 공유된 경험과 보편적 가치관이 미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바타의 모습이지만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 제2의 삶도 지속될 수 없다. 현실이던 메타버스이던 나의 정체성은 설명가능해야하고, 그래야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존속된다. 모든 아바타들이 좀비가 되어 날 뛰는 ‘오염된 피’의 세상이라면 가상공간이라 한 들 꿈같은 제2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메타버스를 살아갈 인류에게 영화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정체성에 대한 시사점을 상기시켜 준다. “우린 기억이 우리를 정의하는 양 기억에 집착하지만,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행동이다.” 박명의 시공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당신이 품격있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방법은 상황이 어떠하든 ‘사람다운 행동’에 답이 있다. 정신병자로 배척받았지만 멋진 성공을 일구어낸 논첼로 조합원, 그에 앞서 정신병자에 대한 마음속의 차별주의를 깨부수고 혁신 환경을 일구어 냈던 선구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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