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이 없는 미국 언론의 '빌 게이츠 이혼' 보도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억측 걷어내고 사실에 충실

데스크 칼럼입력 :2021/05/04 13:44    수정: 2021/05/04 21:00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내가 참 좋아했던 마이클 조던이 이혼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제프 베조스가 이혼할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빌 게이츠의 이혼 소식은 정말 충격이었다. 둘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를 감동적으로 봤던 터라 충격은 더 컸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건 '충격적인' 둘의 이혼소식을 보도하는 미국 언론이었다. 그냥 담담하게 전해줬다. 조금 밋밋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우리 기준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가십성 뉴스는 찾기 힘들었다. ‘헐’ ‘충격’ 따위 불필요한 수식어도 없었다. 꼼꼼하게 살펴본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매체들은 빌 게이츠의 공식 발표를 충실하게 전해줬다. 그걸로 끝이었다.

(사진=뉴욕타임스)

“재미 있는 가십거리 없을까” “혹시 빌 게이츠가 바람 핀 거 아냐”라며 열심히 서핑했던 내 손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세계 부자 순위를 매달 발표하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잡지 ‘포브스’도 밋밋하긴 마찬가지였다.

포스브는 둘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재단 설립 이후의 자선 활동을 간단하게 요약해줬다. 물론 곁다리 소식을 끼워넣긴 했다. 2년 전 이혼한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 지분 4%를 매킨지 베조스에게 넘겼다는, 그래서 매킨지가 세계 부호 대열에 합류했다는 내용을 살짝 첨가했다. 그 대목은 ‘곁다리(tangent)’란 소제목을 붙였다.

그리곤 ‘지켜볼 부분’이란 소제목 하에 결별한 두 사람이 독립적으로 게이츠재단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가 관심사라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뉴욕타임스는 꽤 긴 기사를 썼다. 주로 두 사람의 이혼이 세계 최대 자선기관인 빌&멜린다게이츠재단에 미칠 영향에 초점을 맞췄다. 둘은 재산 절반을 사회 환원하는 '기부서약' 멤버이긴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MS) 관련 자산 상당부분은 아직 기부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뉴욕타임스 기사 역시 철저하게 팩트 위주로 서술돼 있다. 추측이나 소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분량은 조금 짧았지만 CNN 기사도 비슷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우리 가족들의 공간과 사생활을 부탁한다"는 빌 게이츠의 호소를 존중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언론들의 빌 게이츠 이혼 보도를 보면서 많이 비교됐다. 부끄럽기도 했다. 우리 같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아마도 엄청난 기사들이 쏟아졌을 것이다. 각종 가십과 추측 기사들이 포털 뉴스를 빼곡하게 채웠을지도 모른다. 

부지런한 기자들 중엔 둘이 같이 출연한 방송장면을 찾아내 기사를 썼을 것이다. 케케묵은 영상 속 얘기를 뒤늦게 마구 기사화했을 지도 모른다. 얼굴 돌린 채 찍힌 사진을 찾아낸 뒤, “저 때 조짐이 보였다”고 단정했을 수도 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실 보도'다. 충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확인된 사실만 쓰는 게 보도의 기본이다. 그게 언론학 교과서에서 강조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이혼 같은 개인적인 사건을 보도할 때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잘 구분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가장 모범적이었던’ 빌 게이츠 부부의 충격적인 이혼을 보도하는 미국 언론들이 놀라웠던 건 이런 부분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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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일 정도로' 밋밋한 미국 언론의 빌 게이츠 이혼 보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를, 주변을 한번 돌아봤다. 어쩌면 언론의 품격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기본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언론학 교과서를 다시 뒤적이게 될 것 같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