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인류의 관계 방식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포스트 노멀 시대의 커뮤니케이션과 IT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의 ‘동기’(motive)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개개인의 다양한 자발성을 조직의 목표로 연결하기 위한 ‘동기부여’(motivation)에 대해 살펴보겠다.
동기와 동기부여
우리가 흔하게 겪는 지식의 오류 중 하나는 주체와 객체의 혼란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체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주체는 바로 나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책임을 내가 이해해야 하는 대상인 객체에게 전가한다. "난 널 이해할 수 없어" 적어도 이 말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아닌 나의 몰이해에 대한 성찰의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동기와 동기부여 또한 다르지 않다. ‘어떤 일이나 행동을 일으키게 하거나 마음을 먹게 하는 원인이나 계기’인 동기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집단이나 개인 혹은 동물에게 어떤 특정한 자극을 줘 목표하는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인 동기부여의 주체는 특정한 목적을 가진 조직이다.
조직은 작게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크게는 국가에서 지구촌까지 확대할 수 있다. 아직 우주까지는… 한마디로 동기부여 이론(theory of motivation)은 개인에게 조직을 위해 행동할 자발성을 부여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비롯됐고, 그 시작은 아마도 교육학의 절박함에 심리학이 응답한 결과일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동기부여를 교육용어로 분류하고, "학습자의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이제 아이들은 여전히 특정한 사회적 환경 - 귀족, 상인 혹은 수공업자의 자식으로서 - 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가 나중에 무엇이 될 것인지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출생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시민계급에게 만연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출생의 원칙 대신에 개인의 업적이라는 원칙이 관철되면 귀족계급의 특권을 깨뜨릴 수 있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상승도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Hermann Giesecke ‘근대교육의 종말’ 中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한 시민계급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교육의 선발기능 강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동들에게 먼 미래에 성취할(지도 모를) 지위를 위해 교육이라는 고통을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오직 선발에만 혈안이 돼 있던 시민계급에게 루소(J.J. Rousseau)는 교육소설 '에밀'을 통해 "아동은 작은 성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닌 독립된 존재며, 이런 이유에서 아동의 현재 삶은 성인의 미래에 의해 희생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굳이 루소까지 소환하지 않아도 교육을 둘러싼 이런 변화의 과정은 가정에서도 흔히 겪는 일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기 전까지 교육은 부모들의 취향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교육의 과정에서 부모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역의존성(자식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부모가 자식의 미래에 의존하는)을 깨닫게 되고, 의존의 무게 중심이 부모에서 또래집단으로 이동하게 되면, 부모는 자연스럽게 루소의 수 세기 전 통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동하고 있는 동기부여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동기화 욕망이 역설적으로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의 창궐로 이어졌듯,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자 했던 노력은 동기부여가 불가능한 다양한 개인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동기부여 이론은 그 대상이 개인의 동기에 주목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무게 중심이 개인이 아닌 조직에 있었다. 동기부여 이론으로 가장 잘 알려진 매슬로우의 '욕구 계층 이론'은 인간이 가진 5가지 욕구(생리, 안전, 사회, 존경, 자아실현)를 동기부여와 연결한 이론이다. 즉 개인에게 조직의 목표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려면 인간에게 내재화돼 있는 욕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더퍼'는 매슬로우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ERG 이론을 제시했다. ERG는 생존(Existence needs), 관계(Relatedness needs), 성장(Growth needs)의 영어 앞글자다. 동기부여에 관한 더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의 욕구를 낮은 수준(X)과 높은 수준(Y)으로 분류한 '맥그리거'의 X-Y 이론은 인간의 동기를 가장 극단적으로 분류한 동기부여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동기부여에 관한 다양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노멀에 진입할수록 조직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동기를 희생할 개인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화 '판도라'를 보면 군 통수권자이자 행정의 수반인 대통령조차도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을 막기 위해 군인이나 소방대원의 투입을 명령하지 못하다. 지금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에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던지라고 명령할 수 없는 시대다. 과거에 집단이 개인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단에 의지하지 않고는 개인의 생존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농경사회를 떠올려 보라.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에서는 굳이 집단에 의지하지 않아도 생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아니, 집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오히려 번거로울 뿐이다. 얼마 전 한글 관련 시민단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대표와 부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은 정확히 6시가 되자 모두 칼퇴근을 했다. 그 지극히 당연한 일이 나에게는 퍽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해야할 일을 모두 마치고 퇴근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야 하는 조직과, 6시가 되면 하던 일을 모두 중지하고 퇴근해야 하는 동기를 가진 구성원 사이의 간극을 시간이 갈수록 벌어질 것이다.
동기와 동기부여 사이에 존재하는 IT의 역할
현대 미술가는 낡은 르네상스 시대의 형식으로 비행기와 원자폭탄, 라디오, 그리고 이 시대를 표현할 수 없다. 모든 시대는 각기 자기 시대만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그렸던 '잭슨 폴록'은 화가의 예술 영역을 결과로서의 '그림'에서 과정으로서의 '행위'로 확장한 최초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폴록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필연적 행위를 우연의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폴록 이전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전 무엇을 그릴지 대상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표현해야 할 대상에 화가의 해석과 기법이 필연적으로 더해져 그림이라는 예술 작품이 됐다. 하지만 폴록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달라진 시대를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폴록은 수직으로 세워진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고, 물감이 든 통을 흩뿌려 그림을 그렸다. 1999년,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대학 '리처드 테일러' 박사는 그 독특한 예술가의 우연 행위가 가지고 있는 위대함을 프렉탈 이론을 동원해 '증명'했다.
다양한 동기부여 이론이 있지만, 정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개인의 동기를 정량화한 이론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개개인이 무엇에 흥미를 느껴 접근 동기를 발휘하는지, 아니면 무엇이 두려워 회피 동기가 발동되는지 계량하는 것은 불가능한 영역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동기의 정량화는 이미 우리 일상에 흔히 활용되고 있다. 정성적 영역에 있던 개인의 동기를 투박하게 정량화해 마케팅에 활용한 것이 바로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최근엔 개인이 갖고 있는 동기를 대량으로 정량화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기업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구글이, 그리고 페이스북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이유는 다양한 개인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동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그 소중한 개인의 동기 정보를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알려주는 것일까?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자발적으로 나의 소중한 동기 정보를 구글과 페이스북에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가끔 우스갯소리로 나는 구글과 페이스북의 무임금 노동자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구글과 페이스북이 개인의 동기 정보를 정량화할 수 있는 배경에는 날로 진보하고 있는 IT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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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IT가 시간이 지나면 기억 저편으로 흩어져 버리는 조직 구성원들의 다양한 행동과 말, 그 뒤에 숨어 있는 능력과 취향 등을 데이터화할 수 있다면? 아무리 조직의 대표라고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개인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닌 무색무취의 IT가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동기와 조직이 동기부여 하고자 하는 목표 사이를 연결할 수 있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나아가 동기를 가진 개인이 동기부여를 해야 하는 조직의 작은 부분집합이 아니라 동기와 동기의 합집합이 동기부여를 해야 하는 조직의 목적과 같아질 수 있다면?
IT가 만들어 갈 미래는 결국 유토피아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차고 넘친다. 조지 오웰의 ‘1984’부터, 자발적 동기를 가진 인공지능이 그 우월한 물리력으로 인간을 멸망시키는 ‘터미네이터’까지… 인간이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는 세포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결과라면, 인공지능은 디지털 신호인 0과 1이 물리적 결합을 넘어 유기적 결합으로 나아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리처드 테일러 박사가 그저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려 놓은 폴록의 그림을 프렉탈 이론으로 증명했던 것처럼, 날로 진보하고 있는 IT가 개인이 갖고 있는 동기와 조직이 바라고 있는 동기부여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