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겠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낯섦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국내 여행과 달리 섣불리 외국 여행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 낯섦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목적으로 외국에 나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단체에 묻어 여행이 아닌 연수를 서너 번 다녀왔을 뿐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가장 두려운 낯섦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래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기 전 우리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어떻게 갈지, 어디서 묵을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볼지… 우리는 사전에 의도한 계획이 낯선 여행지에서 동기화되기를 기대하지만, 사실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계획과 여행이 동기화되지 않고 어긋나는 데 있다.
정보기술의 동기(motive)는 커뮤니케이션의 동기화(synchronization) 욕망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운전을 좋아한다. 운전이 애완동물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유 중 하나는 나의 행위와 애완동물의 반응이 쉽게 동기화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전처럼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관계의 동기화가 쉽지 않다. 각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만 취하려는 확증편향으로 인해 부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예전과 같은 일체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부부 간에는 가부장제와 페니미즘이 동기화를 방해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는 빠른 시대 변화로 인한 세대 차이가 동기화를 방해한다. 예전엔 우스갯소리로 아버지는 차를 다섯 대 가지고 있고, 자식은 두 대 가지고 있는 걸 세대 차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꺼냈다간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 해짐)'에 빠질 수 있다. 서로 마음은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필요할 때만 제한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나만 그런가?).
내가 운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의지와 가장 동기화가 쉬운 것이 그나마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물론 운전 중 지나치게 난폭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소심한 운전자를 만나게 되면 심하게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위험이 오히려 교통 법규라는 동기화를 강제하기도 한다. 관계의 동기화 측면에서 보면 나에게 자동차는 애완동물과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동기화는 아마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코로나라는 이변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백투더퓨처’(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가 있다. 타임머신이라는 매력적인 소재에 스필버그의 천재적인 연출이 더해져 세 번째 시리즈까지 흥행이 이어졌다. 만약 타임머신이 진짜로 있어 과거와 미래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말이 안 통하는데, 전혀 다른 시대의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할 수 있겠는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누구나 관계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 욕구가 과잉돼 나타나는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동기화다. 커뮤니케이션의 동기화를 가장 크게 방해하는 물리적인 제약은 다름 아닌 장소다. 어쩌면 정보기술의 발전은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효율적으로 동기화시키기고 싶은 욕망의 결과일 수도 있다. 1866년 전보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대서양을 건너 소식을 전하는데 2주라는 시간이 걸렸다. 전보는 그 시간을 무려 2천500배 넘게 단축시켰다. 사실 전보 다음에 발명된 팩스보다 고작 100배 정도 빨라진 인터넷은 감히 전보 앞에서 명함을 내밀면 안 된다(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참조).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의 창궐
지금은 마음만 먹는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편지나 목소리, 심지어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정보기술이 발전했다. 하지만 모든 의도는 역설된다. 커뮤니케이션을 동기화하려는 의도는 역설적으로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의 창궐로 이어졌다. 혹시 문득문득 생각나는 옛 친구나 연인이 있는가? 바람이 서늘해지고, 어쩌다 데굴데굴 구르던 낙엽이 내 신발 위에 살포시 앉기라도 하면 미친 듯이 그리워지는 그런 친구나 연인 말이다. 만약 있다고 하더다도 그냥 그 그리움을 즐기시기 바란다. 혹시라도 서로 연락이 닿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움이라는 애틋함만 잃을 뿐, 얻는 것은 별로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기와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이 혼재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Anti-communication’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글에서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를 대상, 목적, 그리고 불완전성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뜩이나 불완전한 커뮤니케이션에 동기와 비동기 커뮤니케이션까지 섞이면서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몇 가지 들어 보겠다.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을 때마다 페이스북에 글을 쓴다. 그리고 내 외침에 동기화된 반응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빠른 동기화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기대와 어긋난 동기화는 마음에 난 상처를 더욱 곪게 만든다. 페이스북의 문제도 아니고, 내 외침에 대한 반응의 문제 또한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동기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한 나의 올드한 기대 때문이다.
하나 더, 나는 전화와 문자, 그리고 카톡을 구별해서 쓰는 편이다. 편한 상대이거나 숨 돌아갈 정도로 급할 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하지만, 아무리 급하더라도 상대가 편하지 않거나, 또는 덜 급한 상황이라면 전화보다는 문자를 선택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동기화가 급하지 않다면 그 다음으로는 카톡을 사용한다. 반면, 페이스북, 블로그, 기타 온라인 커뮤니티에 수고스럽게 글을 올리는 이유는 동기화된 커뮤니케이션을 바란다기 보다는 스스로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이다.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의 시대
위에 든 예는 필자의 주관적인 취향일 뿐이다. 내가 전화, 문자, 카톡을 구분해 사용한다고 상대방에게 나의 커뮤니케이션 취향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동기화가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경우, 서로 다른 취향의 충돌은 커뮤니케이션의 동기화를 위해 노력해 온 과학자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등장한 신조어가 바로 '읽씹', '안읽씹'이라는 단어다. 필자는 가끔 사랑을 듬뿍 담아 딸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그리고 읽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숫자 1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분명히 알람은 갔을 텐데? 이런 상황이 바로 '안읽씹'이다. 한참 다른 일을 보고 다시 한 번 카톡을 열어 읽었는지 확인을 한다. 분명 숫자 1은 사라졌는데, 답장이 없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읽씹'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사랑이 일방향이니 '읽씹'이든 '안읽씹'이든 감내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야 하는 상대와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별로 없었다. 펜팔, 편지, 방과 후에 동네 친구들이랑 앞에 공터에서 구슬치기, 팽이 돌리기, 망 까기 등을 하며 땅거미가 질 때까지 놀았다. 일본의 거장 '우라사와 나오키'는 만화 ‘21세기 소년’에서 아이들의 놀이는 끝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하루의 놀이가 끝나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들이 집 앞에서 저녁밥을 먹으라고 목놓아 자식들의 이름을 부를 때였다. 부모님의 동기 커뮤니케이션에 빨리 응답하지 않으면 저녁밥을 굶거나, 밥을 먹더라도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을 각오해야 한다. 나는 최근 코로나로 인해 가족들과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아이들은 각자 방을 차지하고 있고, 아내는 거실을 점령하고 있다. 필자는 가족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이방저방 노크를 하고 다닌다. 싸늘한 반응이 돌아온다. 같은 집 안에 있더라도 얼굴을 마주볼 수 없으니 가족이 만든 단톡방이 가장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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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는 확실히 동기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다. 이야기를 하면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반면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비동기 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 태어나 쭈욱 그 환경 속에서 살아오고 있다.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을 감내할 수 있는 가족 관계가 아니라면, 특히나 업무를 위해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이 반드시 필요한 기업 환경이라면 대면, 비대면 커뮤니케이션과 더불어 동기,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을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기업의 수장이 위계를 탑재한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과, 언제나 즉답이 필요한 동기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다고 온라인과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한 직원들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순 없다. 아니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듯, 커뮤니케이션의 동기화에 대한 과잉은 커뮤니케이션 대상과의 동기화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을 표류하게 할 뿐이다. 그나마 불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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