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지혜를 찾아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첫번째 적이다.”
소설 '람세스'에서 야생황소와 마주했던 아들 람세스에게 아버지 파라오가 던진 말이다. 공포는 불안장애(anxiety disorder)의 하위개념이다. 불안장애는 공포 외에도 분리불안, 범(凡)불안장애, 강박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이중에서 공포는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특정공포,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일을 회피하는 사회공포, 넓은 광장과 같은 특별한 주변환경에 놓일 때 겪게 되는 광장공포나 폐쇄공포 등이 있다고 한다.
소년 람세스에게는 날카로운 뿔을 들이대고 달려드는 성난 황소가 특정 공포의 원인이었겠으나,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의 색깔이 다르니, 가슴 조이는 두려움과 공포의 보편적 근원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일은 두려움과 공포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도전, 생명의 계속성에 위협을 느껴 편안함과 평정심을 잃게 될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역설적인 것은 편안한 상태에서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가장 많은 학습을 한다. 그런 이유로 학습은 공포와 두려움이 낳는 긍정적 결과이며, 공포와 두려움이 낳는 부정적 결과가 불안장애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8만년전의 원시생활을 소재로 한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 1981)’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원시인에게는 추위, 굶주림, 어둠, 약탈의 위협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을 터인데, 이러한 공포에 맞서기 위한 도구로서 불은 귀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영화의 원시인은 내려친 번개로 어쩌다 얻은 불을 신성한 것으로 지킬 줄만 알았지 만드는 방법은 몰랐다. 이웃 부족과의 싸움 와중에서 불을 잃은 부족은 3인의 청년을 뽑아 불씨를 찾아 보낸다.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난 3인의 원시인 청년은 두려운 세상과 마주한다. 그러나 그들은 발달된 부족으로부터 마찰열로 불을 만드는 기술을 학습하는 행운을 거머쥔다.
인류가 불을 만드는 순간 불의 신성은 사라진다. 경외의 대상을 만들 수 있다면 신성은 사라진다. 혹자는 “두려움이 지식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원시인 역시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돌을 깨고 갈아서 창을 만들었고, 굴 속에서 불을 지펴서 밤의 두려움을 극복했다. 얼어 죽을 두려움 때문에 가죽 옷을 꿰매 입고, 배를 곯을 두려움에 경작을 시작하고 남은 식량을 저장했다. 약탈당할 두려움에 부락을 형성하고 성을 쌓아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애써 얻은 경험이 휘발할까 두려워 문자를 발명하고 책을 엮었다. 이렇게 쌓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넓게 활용하려 드디어 인류는 보편적 지식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체계의 핵심은 구조화이다. 구조화란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는 다수의 서브개념을 찾아내는 일이다. 빌딩을 골제와 기둥, 바닥과 지붕, 내장제와 유틸리티(전기, 가스, 상수/하수도)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일이 구조화이다.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 나가면서 분화는 심화된다. 학문의 분화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분화된 학문이 복잡성을 가중시키고, 하나의 학문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학제간 융합, 학문의 통섭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것저것 합쳐진 여러 요인을 동시에 고려하려다 보니, 정형 데이터와 비정형 테이터, 실시간과 비실시간 정보를 모두 다루어야할 빅데이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결국 빅데이터는 사람의 지혜로 처리할 능력을 벗어났고, 인공지능, 머신러닝, 딥러닝이라는 IT기술이 출현하게 된다. 딥러닝은 머신러닝의 하위개념이고, 머신러닝은 인공지능의 서브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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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로 지하철의 옆사람이 기침을 하니 주변의 여러 사람이 주저없이 바로 옆 칸으로 이동한다. 너도 나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손을 자주 씻기 때문에 급성호흡기 질환자가 엄청 줄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죽음의 공포가 인류를 감싸고 있다. 아직까지 정복할 수 없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공포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IT 신기술이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수단으로 더욱 심도 깊고 넓게 활용되기 시작하고 있다. 앞서가는 미래학자나 공상영화에서는 IT기술 덕분으로 죽지 않는 영혼을 가진 신인류를 예견하기도 한다. 죽지 않는 영혼이라 함은 결국 인공지능의 실현이다. 인공지능으로 신의 영역인 죽음의 정복이 과연 이루어질까? 만약 죽음이 정복된다면 마지막 신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미래의 신인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 것인지 궁금하다. 두려움이 없다면 지혜는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코로나가 죽음의 두려움과 함께 지혜의 근원에 대한 화두를 떠올리게 만든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