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
남자 1호가 여자 1호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 그만 은퇴하려고.”
그 무렵 여자 1호는 굵직한 자리에서 막 물러난 참이었다. 평생 쓸 수 있을 돈은 벌어 놓은 상태. 그는 남자 1호에게 앞으로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낼 계획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남자 1호. 서둘러 여자 1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곤 이렇게 제의했다.
“잠깐. 그럴 게 아니라, 우리 오랜만에 식사나 같이 하지.”
그렇게 해서 남자 1호와 여자 1호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게 됐다. LA에 살고 있던 남자 1호가 여자 1호 거주지인 팔로알토까지 직접 날아갔다. 식사 시간은 세 시간 남짓.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남자 1호는 여자 1호의 ‘경영 본능’에 다시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이 자리에서 둘은 ‘10분 이하 짧은 동영상으로 승부하는 플랫폼’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그것도 그냥 동영상이 아니라 할리우드급 고품격 영상으로 승부하는 플랫폼.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6일(현지시간) 공식 서비스를 시작한 퀴비(Quibi)다.
여기서 남자 1호는 제프리 카젠버그. 월트 디즈니 회장을 역임하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공동 창업자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할리우드의 대표적 실력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여자 1호는 멕 휘트먼이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다. HP 최고경영자(CEO)도 역임했다.
둘은 1989년 디즈니에서 처음 만난 사이. 30년 묵은 오랜 친구 사이였다.
■ 코로나19로 우여곡절 끝에 출범…할리우드+실리콘밸리 장점 결합
위 일화는 미국 IT 전문매체 더버지가 소개한 내용이다. 둘이 통화를 한 것은 2017년이었다.
그 무렵 카젠버그는 드림웍스를 막 그만뒀다. 휘트먼 역시 HP 엔터프라이즈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참이었다. 한 때 캘리포니아 주지사에도 출마했던 휘트먼은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만남 이후 둘은 새로운 도전에 함께 나섰다. 그게 동영상 OTT 서비스 퀴비다.
퀴비는 출범하기까지 적잖은 시련을 겪었다. 때마침 몰아닥친 코로나19 때문에 출범 기념 행사가 취소됐다. 각종 오프라인 홍보 계획도 다 접어야만 했다.
출범 당일에도 시련은 계속 됐다. 한 시간 가량 서비스 오류가 발생한 것. 우여곡절 끝에 첫 발을 내디딘 퀴비지만, 많은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넷플릭스가 주도하는 OTT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올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카젠버그와 멕 휘트먼은 흥미로운 조합이다. 할리우드의 창의력과 실리콘밸리 기술력의 결합. 실제로 카벤버그가 휘트먼의 결심을 이끌어낼 때 했던 얘기이기도 하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Alumni와 인터뷰에서 휘트먼이 실제로 털어놓은 내용이다.
퀴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장점을 잘 살렸다.
본격 출범하기 전까지는 카젠버그가 많은 역할을 했다. 카젠버그는 1984년부터 1994년까지 월트디즈니 회장을 역임했다. 또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공동 창업했다. 할리우드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이력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할리우드 저명 인사들과의 콘텐츠 계약을 체결하는 데 큰 힘이 됐다. 프로그램 아이디어 같은 것들도 카벤저그가 총괄했다.
덕분에 퀴비에는 쟁쟁한 스타들이 콘텐츠를 제공한다. 조 조너스, 이드리스 엘바, 소피 터너, 크리시 티건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다양한 쇼를 진행한다. 제니퍼 로페즈, 윌 스미스에 농구 스타 르브론 제임스 이름까지 눈에 띈다.
감독들의 이름도 화려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리들리 스콧, 앤트완 푸콰 같은 저명 감독들이 퀴비용 독점 콘텐츠를 공급한다.
카젠버그가 그린 밑그림을 운영하는 것은 휘트먼의 몫이다. 고객을 확보하고, 또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라면 휘트먼 만한 경험을 가진 인물을 찾기 힘들다.
휘트먼은 직원 30명이던 이베이를 10년 만에 직원 1만5천명, 매출 80억 달러 기업으로 키워냈다. HP CEO로 영입된 뒤에는 소비자 부문과 B2B 쪽을 분할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퀴비의 또 다른 경쟁 포인트는 ‘턴스타일’ 기술이다. 가로 세로 어느 쪽으로 봐도 전혀 손색이 없도록 영상을 제작한다. 모바일 최적화 기술인 셈이다.
■ '이동중인 고객' 타깃으로 한 퀴비, 코로나19로 전략 수정 불가피
퀴비가 발을 들여놓은 OTT시장은 지금 포화 상태다. 넷플릭스, 애플TV 플러스에 디즈니 플러스까지 다양한 강자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물론 퀴비는 이들과 경쟁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10분 이하 짧은 영상’이란 새로운 영역을 노리고 있다. 그렇다고 유튜브 같은 가벼운 영상과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10분 이하 짧은 영상이지만 할리우드급 고품격을 지향한다.
출발 자금은 충분하다.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의 결합이란 모델에 흥미를 느낀 많은 투자자들이 지갑을 열었다. 순식간에 17억 5천만 달러를 유치했다.
하지만 시장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일단 퀴비가 출발 당시 생각했던 많은 그림이 흐트러져 버렸다.
퀴비는 ‘10분 이하 영상’을 앞세워 이동중인 고객을 타깃으로 삼았다. 잠깐 짬을 내서 들여다볼 수 있는 콘텐츠. 그래서 퀴비는 설계 단계에서 ‘다운로드’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전날밤 스마트폰에 다운받은 뒤 다음날 잠깐 시간을 내서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란 변수가 생겼다. 극장, 체육관, 백화점 할 것 없이 모두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집에 틀어 박혀 있다. 당초 생각했던 그림이 완전히 달라졌다.
퀴비는 뒤늦게 ‘빈지 뷰잉’ 쪽에 눈을 돌렸다. 서버 테스트까지 했다. 거뜬하게 소화했다.
자신있게 출범했지만 첫날부터 사단이 생겼다. 한 시간 가량 서비스 오류 발생. 호된 신고식을 치뤘다.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당초 그림과 다른 상황 때문에 생긴 난리였다.
그런데 사이트 오류는 휘트먼에겐 낯선 상황은 아니다. 더버지에 따르면 휘트먼은 이베이 출범 때도 첫날부터 사이트가 다운돼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다. 당시엔 무려 8시간이나 사이트가 먹통이었다.
퀴비의 비즈니스 모델은 월정 구독료와 광고 수입 두 가지다. 구독료는 월 4.99달러(광고포함)와 7.99달러 두 가지 요금제로 운영된다. 광고는 영상 시작 전에 띄워주는 방식이며, 중간 광고는 없다.
구독자는 지금부터 확보해나가야 한다. 첫해 광고 물량도 비교적 순조롭게 채웠다. 휘트먼은 더버지와 인터뷰에서 “첫 해 공고 물량 1억5천만 달러를 모두 판매했다”고 밝혔다. 초기 주요 광고주로는 프록터&갬블, 펩시, 월마트 등이 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닥쳤다. 오프라인 행사들이 대거 취소되면서 차질이 생겼다. 휘트먼은 세계 주요 광고 이벤트 중 하나인 칸 라이온스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닷새 동안 40여 광고주들과 미팅을 할 계획이었다. 6월로 예정됐던 이 행사는 10월로 한차례 연기된 끝에 취소돼 버렸다.
출범 첫해 광고 물량은 어느 정도 채웠지만, 내년 영업의 밑그림을 그리려던 계획은 어그러져 버렸다.
■ 휘트먼의 마법, 모바일 OTT 시장에서도 빛을 발할까
과연 퀴비는 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긍정적인 전망을 하는 쪽은 카젠버그와 휘트먼의 ‘멋진 결합'에 기대를 건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실리콘밸리 실력자 멕 휘트먼이라면 큰 일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휘트먼은 미국 역사상 포천500 기업을 이끈 세 명의 여성 CEO중 한 명이다. 특히 온라인 경매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 이베이 성공 사례는 휘트먼에겐 둘도 없는 훈장이다.
반면 비관론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베이는 휘트먼이 없었더라도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베이가 출범하던 무렵엔 이미 온라인 경매는 ‘발사 직전의 로켓’ 같은 산업이었다는 것. 따라서 이베이의 성공을 온전히 휘트먼의 역량으로 돌리는 건 과대 평가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퀴비를 잘 키워낸다면 휘트먼 생애에서 가장 큰 성공 사례로 평가될 것이라고 더버지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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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남자 1호 카젠버그. 그리고 실리콘밸리 최고 경영자 중 한 명인 여자 1호 휘트먼. 과연 이들은 퀴비를 통해 모바일 OTT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출발부터 쉽지 않았던 이 과제는 최근 코로나19 때문에 난이도가 더 올라가 버렸다. 남자 1호와 여자 1호의 ‘멋진 앙상블’이 더 요구되는 건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