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 성착취 범죄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박사방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가담자의 신상을 밝히고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 청원에 500만명 이상이 참여하고, 문재인 대통령 또한 엄정한 수사를 지시하면서 경찰 수사에 속도가 나고 있다. 범죄 가담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더불어 사회 각계에서 이 같은 인격살인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강구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이에 제2의 n번방·박사방을 막기 위해 정부와 국회, IT 업계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편집자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해 9월 그동안 운영해왔던 디지털성범죄대응팀을 지원단으로 확대·신설하고 신속 심의에 나섰다. 디지털성범죄심의지원단은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재생산될 가능성이 큰 성범죄 정보를 조기 차단하기 위해 상시 심의회의를 개최하고 24시간 이내 삭제와 차단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성범죄 정보나 불법 촬영물 등 대다수의 콘텐츠는 국내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지 않고, 법망을 피하기 위해 해외 플랫폼과 서버를 통해 유통되는 탓이다.
이번 n번방이나 박사방 등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착취물도 '텔레그램'과 '위커'라는 해외 플랫폼을 통해 공유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회와 정부가 나서 관련 법제화 정비에 나선 모습인데,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는 해외 사업자들을 단속할 만한 법적 근거가 마련될지 관심이 모인다.
■ 해외 플랫폼 심의·규제 쉽지 않아…"삭제 요청·자율 심의 독려 정도"
텔레그램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는 텀블러라는 소셜 미디어가 불법 음란물 문제의 중심이었다. 방심위가 국내 플랫폼 대상으로 음란물 심의를 강화하자 텀블러로 유통책이 옮겨간 것이다.
2017년 방심위는 텀블러 측에 불법 콘텐츠 대응 협력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한 바 있다. 그러나 방심위가 미국 본사로 찾아가고, 두 차례 회상회의를 진행하며 메일로 끈질기게 설득해 텀블러의 음란물 유통 방지 협조를 이끌어냈다.
최근 국내에서 텔레그램과 디스코드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대응이 쉽지 않다. 불법 촬영물을 지우기 위해서는 텔레그램 신고센터로 요청하는 방법밖에 없다. 26일 방심위에 따르면 올해 방심위는 디지털성범죄와 관련해 텔레그램에 143건(이달 20일 기준)의 자율규제(삭제)를 요구했으며, 55건의 시정요구를 했다. 디스코드에 대해서는 8건에 대해 자율규제했고, 9건은 시정요구했다.
텔레그램은 아동학대 관련된 채널 신고채널에서 삭제 요청 들어온 건을 삭제하고 있다고 알리는 정도의 조치만 취하고 있다. 이에 방심위는 문제가 된 콘텐츠가 삭제됐는지 직접 확인해야 하는 실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텔레그램이 음란물을 직접 관리하기 보다는, 각 나라에서 삭제 요청한 것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서비스들은 국내에 사업장을 두고 있지도 않고, 법망을 피해가고 있어 규제가 힘들다는 한계가 있다.
방심위는 n번방과 박사방 등 미성년자를 포함해 여성 성착취물 제작과 공유 등에 대한 강력한 조사와 처벌에 대해 사회적 담론이 형성된 만큼, 제대로된 입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방심위 관계자는 "텔레그램과 위커 등 전방위적으로 음란물에 대해 모니터링을 하고 있지만, 제한된 인력으로는 모든 인터넷 상 콘텐츠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강상현 방심위원장은 25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텔레그램 n번방’ 대책 마련을 위한 전체회의에서 “해외사업자에 대한 시정요구를 했을 때 관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며 “그동안 과방위 지적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 시정요구를 하는 것을 해외사업자도 수용해 의무화하는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국회도 심각성 인정…입법 러쉬 예고
그동안 국회 안팎에서는 해외 사업자 규제 실효성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지적됐지만, 국내에 대리인을 둔 회사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해결책은 없었다.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규제가 나와도 국내 사업자에게만 해당돼 역차별 이슈만 부각됐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n번방과 박사방 처벌 관련 여러 국민 청원에 500만명 이상이 서명했고, 청와대가 응답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엄정 수사를 지시하고 경찰과 여성가족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당국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수사와 처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방위 긴급 회의에서도 여야 의원들은 실효성 있는 규제를 담보할 입법 마련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국회 과방위에서 다크웹이나 불법 콘텐츠 유통 등에 강력한 규제와 대책마련에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송희경 미래통합당 의원은 25일 ‘n번방 방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송 의원이 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불법촬영물 제작자와 유포자에 대한 처벌 강화 ▲불법촬영물 구매 및 소지자에 대한 벌금 신설을 골자로 한다.
또한 불법촬영물의 유통 거래를 방조하거나 삭제 조치에 소극적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아동·청소년대상 음란물 범죄에 대한 처벌도 강화될 예정이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 ▲아동·청소년대상 음란물에 대한 제작자·유포자·소지자에 대한 형량 강화를 기대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백혜련 의원이 'n번방 재발금지 3법'을 대표발의했다. 이는 형법·성폭력처벌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으로 ▲불법촬영물을 통한 협박행위를 처벌하고 ▲유포 목적이 아니라도 불법촬영물을 내려받는 행위도 처벌하며 ▲불법 촬영물 유통을 방치한 플랫폼 사업자를 처벌하는 것이 골자다.
이 두 법안 모두 플랫폼 사업자를 처벌한다는 조항이 담겨져 있지만, 법이 통과된다고 해도 텔레그램과 위커 등 문제가 되는 플랫폼을 규제하거나 처벌받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해외 플랫폼이 해외 사업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내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역외규정을 신설하고 국내 대리인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며 "사업자가 불법촬영물 예방·방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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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터넷업계 관계자는 "해외 플랫폼 기업을 규제할 수 없다면 또 다시 역차별 논란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며 "해외 사업자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당장은 실효성이 없을 수 있지만, 법제화를 해 해외 사업자들도 책임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면서 "국회의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