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과 봉준호는 한 글에 같이 담아야 할 필요가 적은 관계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둘을 소환한 까닭은 ‘비평’과 ‘창작’의 ‘생산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진중권의 업(業)은 비평 쪽에 가깝다. 요즘 주로 정치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의 관심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봉준호의 업은 창작이다. 그중에서도 영화다.
창작과 비평은 알고 보면 세상을 발전시키는 두 축(軸)이다. 창작은 직접 생산하는 쪽이고, 비평은 ‘생산을 생산’하는 쪽이다. 좋은 비평은 ‘더 좋은 생산’을 ‘가속화’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는 비단 예술의 영역에서만 통하는 이치가 아니다. 경제나 정치에서도 같은 이치가 작동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더 낫게 발전하기 위해선 ‘비평’과 ‘창작’이 ‘생산적 관계’를 맺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창작은 대체로 ‘소비’를 전제로 한다. 혼자 만족하기 위한 창작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생산물에 대해서는 비평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소비를 전제로 한 창작은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행위’이면서도 사실은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행위’가 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평이 존재할 여지가 생긴다. 창작이 사회적인 게 아니라면 그것을 대상으로 한 비평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창작이 소비를 전제로 한다면, 창작의 제1 원칙은 마땅히 공감(共感)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공감은 보편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원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을 극대화시켜 공감을 불러내야 비로소 그 혁신성이 빛을 발한다. 누구나 할 수 있거나 할 법한 창작물은 반감은 적겠지만 큰 공감을 자아내진 못한다. 그러므로 혁신은 ‘개인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절절함’에서 나온다.
모든 창작은 그래서 창작자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 절절한 것이다. 여기서 절절하다는 말은 ‘목숨을 걸었다’는 뜻과 진배없다. 소설 그림 영화 등 예술 작품을 만드는 창작이나, 휴대폰이나 자동차처럼 소비 상품을 만드는 창작이나, 인간 사회의 관계를 규정짓는 제도를 만드는 정치적 창작이나 그 점에서는 다들 비슷하다. 소비자의 더 많은 공감을 자아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들인 것이다.
비평은 어떤가. 예술 영역이건, 경제 영역이건, 정치 영역이건, 목숨을 건 비평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비평은 본래 목숨을 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다. 기껏해야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공감의 질량(質量)’을 따져주는 게 비평의 역할일 뿐이다. 비평의 가치를 지극히 폄하해보자면 그것은 창작과 소비 사이를 오가는 기생(寄生)에 다름 아니다.
비평의 본질이 그러하기에 창작을 넘어선 비평은 존재하기 힘들다. 소설 ‘태백산맥’보다 뛰어난 태백산맥 비평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아이폰보다 뛰어난 아이폰 리뷰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영화 ‘기생충’과 이에 관한 수많은 평은 또 어떤가. 그 모든 것들은 ‘태백산맥’과 ‘아이폰’과 ‘기생충’이 없었다면 당연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하니 ‘기생(寄生)’ 말고 달리 어찌 표현하나.
비평의 본질이 그러한데도, 비평에 대해 ‘생산을 생산’한다고 말한 것은, 비평의 3가지 잘 못된 형태를 비판함으로써, 비평과 창작 사이의 생산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첫째, 비평을 권력으로 인식하는 행태다.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공감의 질량(質量)’을 자신들의 비평으로 좌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행태다. 실제로 많은 영역에서 비평가들이 무책임한 갑질을 해댄다.
둘째는, 사익(私益)을 위한 비평이다. 비평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주관적 견해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주관마저 기본적으로 사회적 행위여야 한다. 비평은 사회적일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의 비평은 사적 이익을 위한 경우도 많다. 실체를 왜곡해 도에 넘치는 찬사를 보내거나 그 반대로 근거 없이 비난하는 비평의 경우 대부분 사익 때문이다. 이 또한 갑질의 다른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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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무지하면서도 지나치게 가혹한 비평이다. 창작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건 행위라 했다. 목숨은 누구에게든지 소중한 것이다. 비평은 그래서 기본적으로 창작 뒤에 숨은 피와 땀을 섬세한 마음으로 헤아리려는 자세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게 앎의 출발이다. 이 과정이 생략된 비평은 반드시 무지한 것일 수밖에 없고 비평이라기보다 흉기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또한 갑질의 다른 형태다.
창작과 비평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생산적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를 진화시키는 지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3가지 갑질 만은 청산되거나 자제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영화관에서 들리는 껌 씹는 소리처럼 역겹고 불편할 뿐이다. 비평은 적의 목을 치는 살인의 검이 아니라 날카롭지만 섬세하고 차갑지만 웅숭깊은 식칼 같아야 한다. 그럴 땐 비평도 생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