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순(純) 중국산' PC가 만들 세계 구도

[이균성의 溫技] 미중 패권과 우리의 길

컴퓨팅입력 :2019/12/05 11:23    수정: 2019/12/09 07:34

화웨이가 '100% 순(純) 중국산' PC를 내년에 출시한다는 뉴스는 국내에서 크게 어필되지 않았지만 장차 한국 IT기업의 향배를 좌우할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많다. '100% 순(純) 중국산'이라는 의미는 운용체계(OS)는 물론 프로세서(CPU)와 메인보드까지 자국 내에서 소화하겠다는 거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MS) 인텔 구글 등 ‘미국 그림자’를 지우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산화(國産化). 20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 산업의 핵심 키워드였다. 수출 중심의 고도성장을 한껏 구가할 때다. 기술 발전을 통해 자체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우리가 차지할 수 있는 부가가치를 더 크게 창출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 이후라고 해서 기술의 국산화가 덜 중요해졌을 리는 없지만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 국산화 못잖게 ‘글로벌 시장에서의 전략적 지위’ 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듯 했다.

중국 국기 오성홍기 (사진=이미지비트)

그 이유와 배경을 정확히 따지는 것은 경제학자의 몫이겠지만 대충 짐작할 만한 것은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거세게 확대된 신자유주의 풍토가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 두 가지로 인한 국제 환경의 변화 탓에 개별 기업은 국가 울타리를 벗어나 글로벌 관계 속에서 자신이 설 곳을 찾는 게 더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게 된 거다.

국경을 넘는 자본의 대이동이 본격화했고 글로벌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합리적인 국제 분업을 이끌어냈다. 미국은 금융과 첨단 IT 플랫폼에 집중했고, 중국은 단순 제품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공장’이 됐으며, 한국은 제조-IT 산업을 강화했고, 일본은 부가가치가 큰 부품 산업에 더 집중했다. 이런 구조가 지속된 이유는 당연히 미국 정부와 미국 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도 지난 20여 년간 이 구조를 즐겨왔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제조업은 승승장구했고 인터넷 게임 SW 등을 포함한 IT산업도 규모를 키워왔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 경제와 산업구조는 지난 20년 이상 WTO 체제에 잘 길들여져 왔다는 뜻이다. 특히 IT 산업의 경우 이 체제를 주도한 ‘미국의 등’ 위에서 춤을 춘 셈이다. 미국 기술을 원천으로 활용성을 높이는 일이 우리IT 산업의 역할이었던 거다.

문제는 이미 수년전부터 이 체제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기업가 출신인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라고 보는 게 옳다. 트럼프는 과거 대통령들과 달리 이 체제를 증오한다. 미국과 미국 기업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재정적자만 늘어나고 일자리만 줄어든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흉으로 3개국을 꼽는다. 그동안 훌륭한 분업 파트너였던 동북아 3국이 핵심이다. 韓中日 3국 말이다.

‘미중 무역갈등’과 ‘한일 경제전쟁’은 WTO 체제에 대한 트럼프의 배신으로 촉발된 양대 파열음이다. 韓美와 美日도 2차세계대전 이후부터 70년 이상 계속된 전통적인 동맹국이지만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세 나라 사이의 국방비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사실 일본과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지나치게 많을 돈을 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부리는 억지가 엉뚱하게 튀어나온 것일 뿐이다.

중국이 계속 성장하는 한 트럼프도 한국과 일본에 행패만 부릴 수는 없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미국과 일본은 다르지만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은 이미 중국을 외면하고 살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한국 정부를 괴롭히더라도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라는 식의 베팅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건 동맹의 해체를 의미하고 동북아 균열을 뜻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다를 거다. 중국은 트럼프의 WTO 배신과 이어지는 행패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도 승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지난 20년 축적한 최대 무기인 제조 경쟁력과 시장 규모는 물론이고 미국의 최대 강점이었던 자본력과 첨단기술까지 넘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물러나고 미국 정부가 다시 WTO 체제를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중국은 양보할 이유가 없다.

화웨이가 '100% 순(純) 중국산' PC를 내놓는 것은 그 의지를 미국과 세계에 선포한 대표적인 사례다. 인류애 차원으로 가능한 한 WTO 분업체제에서 세계가 동반 번영하는 길을 추구하겠지만 미국이 협력해야 할 나라들을 ‘경제 적국’으로 간주하며 WTO를 배신한다면 미국이 강점을 갖는 분야에서도 정면 승부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재저래 중국의 위력과 파괴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질 것이다.

한국 제조업과 IT 산업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특히 IT산업의 경우가 그렇다. 한국 IT산업은 글로벌 생태계를 고려할 때 그동안 실리콘밸리 기술을 확산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MS 구글 인텔 아마존 등의 기술을 빨리 습득해 현지화하는 일이 그 핵심이다. 그런 이유로 업계 종사자들 또한 실리콘밸리를 추종하는 인물이 대다수다. 실리콘밸리가 일으킨 파도에 잘 올라탄 사람들이 승승장구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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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 업계에서 여전히 중국의 기술 수준을 멸시하고 중국 기업의 위력을 과소평가하려는 풍토가 큰 것도 그런 영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지난 20~30년 실리콘밸리의 등에 올라타 살아왔다면 앞으로 20~30년은 중관촌(中關村)의 등이 필요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걸 지배할 수 없다면 이것저것 살 길을 찾아 충분히 고민해본다고 나쁠 일은 없는 거다.

지미파(知美派)는 이미 차고 넘치는 상태며 진짜 지중파는 더 많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