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갈등을 틈타 중국이 첨단소재 분야에서 약진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공급체계 변화가 중국의 제조2025 전략 가속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18일 중국의 산업전문매체인 디스플레이 오프 위크는 “한일 갈등이 앞으로 중국 첨단 소재 산업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이는 중국 기업들이 첨단 소재 기술을 개선하는데 더 도움이 되고, 일본 소재 업체와의 기술격차를 줄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의 관영 언론 글로벌타임즈도 전날 저우스젠 중국 국제관계연구소 선임연구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 재료, 특히 고급 제품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은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며 “중국은 지금까지 중저급 반도체 소재를 주로 공급해왔다. 지금이 제품을 업그레이드해 경쟁력을 향상할 적절한 시점”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중국 언론의 이 같은 보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탈(脫) 일본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두 업체는 최근 빈화(濱化) 그룹 등 중국 소재 업체들과 만나 핵심소재 공급을 논의하고, 이를 생산라인에 확대·적용하기 위한 테스트에 돌입했다.
결국 일본의 수출규제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돕는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중국 등으로부터 핵심소재를 받게 되면 우리 기업들만의 반도체 소재 레시피(배합)가 노출돼 반도체 굴기를 추진 중인 중국에게 오히려 도움을 주는 꼴이지만, 소재 국산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별다른 방법이 없다”며 “이 기회를 틈타 중국이 장기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반도체 업체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단기간에는 영향이 없더라도 장기적인 영향이 크다고 판단해 일본 외 다양한 국가의 장비·업체들과 만나 해법을 찾는 상황”이라며 “(국내 대기업들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참의원 선거 이후 철회될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앞으로 제2·제3의 수출규제 조치가 이뤄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보여진다”고 전했다.
국내 반도체 장비·소재 업계에서도 같은 우려가 나온다. 이미 중국은 한일 무역갈등을 이용해 본격적인 메모리 반도체 굴기를 위한 협력체계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다 일부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수익창출을 위해 중국에 법인을 설립하는 등 진출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장비 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대표적으로 중국 칭화유니, 대만의 폭스콘 등이 국내 기업들과 접촉해 현지법인 설립과 공동 연구·개발 등의 협력체계 강화를 위한 여러 회유책을 제시하고 있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관계사에 근무하는 고급인력의 유출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 중국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를 전했다.
이와 관련해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오는 2020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중국이 145억달러(약 17조원) 규모로 성장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반도체 장비 시장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전문가들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공급체계 다변화 움직임에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한층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고 있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일 무역분쟁은 관세부과로 대립하는 일반적인 무역전쟁과 달리 상대국 핵심 산업의 필수 중간재 수출을 통제해 공급망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한일 무역분쟁으로 확대될 경우, 최대 수혜국은 중국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주도하던 전기·전자산업의 경우, 독점적 지위가 중국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무역협회는 최근 발표한 ‘통상전략 2020’ 보고서에서 중국의 산업고도화(제조2025)로 한일 간의 대중 중간재 수출구조가 자체가 바뀔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현재 대중국 중간재 수출에서 한국은 1천289억달러, 일본은 853억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일본이 739억달러, 한국이 733억달러로 중국의 중간재 수입수요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옮겨가고 있는 형국이다.
무역협회는 보고서에서 “중국의 산업별 국산화율이 높아질수록 중국의 중간재 수입구조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상대적으로 저급의 중간재 수입은 자국산으로 대체될 것이며, 그에 따라 중간재 수입액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제조하고자 하는 완제품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중간재 수입 역시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품의 비중이 높아질 확률이 있다. 이 경우 중국의 입장에서 낮은 수준의 중간재 수입을 줄이고 고급 중간재 수입을 늘린다면, 현재 중간재 수입선을 한국에서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국가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현재 반도체 산업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일국가(One-Nation) 밸류체인이 형성돼 생산설비 과잉이 초래될 경우, 반도체 생태계가 교란돼 광범위한 후방산업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중국의 산업고도화에 따른 중간재 자급 및 수입처 전환에 대응해 한국 수출기업은 연구개발부문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일본 정부는 지난 4일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을 통해 ▲반도체·디스플레이의 핵심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와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TV와 스마트폰 액정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을 전략물자 수출통제제도상 일반허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개별 수출허가 대상으로 변경하는 수출규제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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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수출규제 조치로 해당 품목을 한국에 수출하는 일본 기업들은 제품명부터 판매처, 수량, 사용 목적과 방법을 적은 서류와 무기용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서약서 등을 경제산업성에 제출해야만 한다.
신청부터 허가가 나오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약 90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핵심소재에 대한 대일의존도(플루오린 폴리이미드 84.5%, 포토레지스트 41.9%, 에칭가스 41.9%)가 높아 실무자들이 일본 출장길에 올라 협력업체들과 해법을 논의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