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배에, 국민은 바다에 비유되곤 한다. 바다는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 국민 무서운 줄 알라는 대표적인 정치 경구다. 이 말은 원래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중국 전국시대 철학자 순자(荀子)의 이야기를 모은 책 ‘순자’의 왕제편(王制篇)에 나온다. 군주민수(君舟民水)가 그것이다. 교수신문은 2016년 국정농단 사건 때 이 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군주민수는 시장(市場)에 대한 경구로 변주될 수도 있다. 기주소수(企舟消水) 정도가 어떨까. 기업이 배라면 소비자는 바다라는 의미에서. 기업을 띄우는 것도 외면함으로써 몰락시켜버리는 것도 결국은 소비자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세계 기업사에서 이런 사례는 숱하게 찾아낼 수 있다. 아이폰은 어떤가. 탄생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이상 징후가 잇따라 기주소수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애플 시가총액은 아이폰이 나오기 전인 2007년에 700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1조 달러 벽을 깨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천100조원이다. 하지만 최근 이중에서 400조원 정도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250조원 정도니 주식가치로만 따지자면 삼성전자 1.5개가 망해버린 셈이다. 아이폰 부진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민심의 바다’가 정권을 뒤집을 때 개별 사례별로 다양하고 구체적인 이유가 존재하지만 그걸 뭉뚱그리면 주객전도(主客顚倒)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민심이 천심(天心)인 게 마땅하지만 가치가 뒤집혀 군심(君心)을 천심으로 여길 때 ‘민심의 바다’는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군주민수가 23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대표적인 정치 경구로 쓰이는 건 그 이치에 대한 통찰 때문이다.
#시장(市場)에선 이 이치를 ‘소비자는 왕이다’는 말로 표현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짜로 소비자를 왕처럼 모신 기업은 잘 되지 않을 수 없다. 아이폰이 그랬다. 그걸 쓰는 것만으로도 소비자는 스스로 왕처럼 고귀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폰 사용자가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다들 알겠지만 애플이라는 기업은 사실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형편없다.
#허리를 굽실거리기는커녕 오만할 정도로 도도한 게 애플이다. 그럼에도 소비자는 왜 애플에 열광했을까. 스티브 잡스의 철학과 그에 따른 실천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잡스가 만든 아이폰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산업구조를 뒤흔든 ‘혁신의 상징’이다. 특히 혁신은 그저 말이 아니었다. 소비자는 아이폰으로 인해 새 세상을 경험했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 잡스가 왕을 모시는 방법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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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는 죽었다. 그러나 애플과 아이폰은 아직 살아 있다. 아니 단지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애플과 아이폰에 스티브 잡스의 철학과 정신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해가 갈수록 엄청 비싸진다는 것은 잘 알겠다. 여기서 주객전도를 본다. 포브스가 최근 "애플 시대는 끝났다“고 쓴 것도 그렇게 봤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부정하는 경제학 교과서는 없다. 팀 쿡은 교과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교과서는 부정할 수 없는 이론이지만,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아이폰 판매량이 처음으로 줄어들기 시작하고 애플 투자자들이 자금을 빼내가는 건 애플과 아이폰이 이 점에서 변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아이폰엔 이제 잡스 향(香)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