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첨단 전자산업인 반도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대다. 1966년 모토롤라코리아가 국내에서 반도체 부품 조립을 시작했다. 이후 아남, 삼성, 금성사(현 LG전자)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우리 기업들이 전자산업의 쌀알이라고 불리는 반도체에 눈을 돌린 것은 전지적 예견이었다. 후발주자로 전자산업에 뛰어든 약점을 극복하고 미국, 일본 등 선진 기업과 경쟁할 '퀀텀 점프'의 가능성을 반도체 산업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전자산업은 TV, 세탁기, 라디오 등 완제품(세트)을 만들어 수출했지만 부가가치가 적어 적자를 면키 어려웠다.
한국반도체가 국산 트랜지스터를 첫 실험생산 것은 1974년. 3년 후 삼성전자가 고밀도집적회로를 개발해 생산했다. 미세한 회로 안에 수 십 만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가는 고밀도 집적회로 개발은 노동 집약적인 중화학 공업 중심이던 한국의 국가 산업구조를 첨단 전자산업 구조로 바꾸는 데 일조했다. 삼성전자는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이듬해인 84년엔 기흥 사업장에 반도체 1라인을 준공하고 본격적인 반도체(DS) 사업에 나섰다.
10년 뒤인 1993년에는 세계 반도체 매출 순위 8위를 차지했다. D램 반도체 생산 세계 선두에 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세계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과 혹독한 '치킨 게임' 끝에 결국 2009년 D램 분야에서 확고한 1위에 오른다. 그 사이 2002년 개발에 성공한 낸드 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 또 한 번 초격차를 이뤄낸다. 삼성전자는 지난 한 해 동안 반도체(디스플레이 포함) 부문에서 97조원을 벌어들였다. 전체 매출(239조원)의 40%다. 영업이익만 40조원에 육박한다.
반도체 산업이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업계 표현대로라면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우리나라 수출액 5천739억 달러(약 630조원)중 반도체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17.4%에 달한다. 지난 5월 반도체 수출은 1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수출비중은 이미 20%를 넘어섰다. ICT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상 최고치인 60%에 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난 1분기 영업이익을 합친 금액만 무려 16조원에 이른다. 우리나라 10만 기업이 9천 가지 품목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지만 반도체 기업의 성과가 더욱 빛이 나는 이유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반도체 패권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과거에 뿌린 씨앗이 오늘날 달콤한 열매를 맺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더 값지다. 40년 전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경제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같은 반도체 호황이 달갑지만은 않다. 불이 꺼진 이후 불어 닥칠 어둠이 너무 깊고 길어질까 두렵다. 반도체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너무 크다 보니 드는 걱정이다. 반도체 등 ICT 산업분야를 빼면 비(非)ICT 산업 분야의 수출 증가율이 오히려 뒷걸음 치고 있다는 사실은 '반도체 착시'에 취해있는 우리 수출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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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팎에서는 이미 알람 신호도 울리고 있다. 중국의 매서운 추격과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가격담합 조사 압박은 예사롭지 않다. 세계 IT 제조기업들의 반도체 재고 수량이 이미 양적 측면에서 채워져 주문량이 줄고 판매 전망이 악화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는 반도체 주식에 대해 '데스크로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경고도 나온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전쟁에 따른 관세보복과 하반기 중 세계경기가 하향흐름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반도체 산업엔 악재다. 퀄컴과 NXP 등 거대 반도체 기업 간 인수합병에 따른 지각변동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핵심기술이냐, 아니냐'를 놓고 법정 소송으로 번진 반도체 작업환경측정보고서 공개 논란부터, 기술 인력의 유출은 업계의 고민을 깊게 만든다.
우리 기업과 직원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반도체 호황이 한국 경제에 리스크로 돌아오지 않도록 산업계와 정부의 선제적인 대책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