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샬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처음 말한 건 1964년이다. 인터넷이 퍼지기 시작한 것보다 30년 전이고 아이폰보다는 40년 앞선 이야기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미디어가 전하려는 내용보다, 미디어 그 자체가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맥루한은 이미 50년 전에 최근 포털 댓글로 떠들썩한 우리 사회의 혼란을 짐작했을 듯도 하다.
보통 미디어(Media)는 매체(媒體)로 번역된다. 매개(媒介)해주는 수단을 가리킨다. 기술의 발전으로 그 수단과 매개되는 내용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그리고 영향력 측면에서 수단이든 내용이든 과거 방식은 점차 새로운 방식에 길을 내줄 수밖에 없다. 인간과 사회는 그리하여 새롭게 조직된다. 육체의 성장이 새로운 세포가 낡은 세포를 갈아치우는 과정인 것과 같은 이치다.
전통 매체는 그래서 기술 변화에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응해 혁신하지 않으면 반동(反動)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으면 수단과 내용 두 측면 다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은 분명한 이치다. 그런데 그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사람을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이게 만든다. 전통적인 언론들이 포털 댓글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두려움이 극단에 이른 탓이다.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현실을 정확히 볼 수 없다. 전통 언론의 위기는 네이버 탓이 아니다. 그보다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그 자신이 위기의 주범이라고 보는 게 옳다. 이대로라면 네이버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위기의 실체는 ‘단순 정보 전달을 위한 매체’로서의 전통 언론 입지가 극도로 좁아졌다는 현실이다. 그건 순전히 기술 발전 탓이다.
트럼프와 트위터를 보라. 트럼프는 언론을 상대로 공식 브리핑을 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록되기에 중요한 팩트를 트윗으로 날리기도 한다. 오히려 후자에 더 큰 팩트가 많을 수도 있다. 기자들이 밤잠을 설치며 그의 트위터를 챙겨야 할 지경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가끔 페이스북을 이용한다. 다른 많은 정치인과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다. 페북과 트위터가 특종하는 시대가 이미 온 것이다.
이는 유통 플랫폼에서 네이버에 밀린 것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네이버에는 어찌됐든 자신이 생산한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플랫폼을 빌리기는 하지만 정보원과 독자를 잇는 매개체로서의 역할마저 사라진 건 아니라는 의미다. 트윗과 페북은 어떤가. 그곳에는 정보원과 독자 사이에 매체가 비집고 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잘난 기자도 트럼프의 5230만 팔로어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러니 이제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네이버에 그렇게 했듯, 미디어의 책임을 다하라고 추궁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정보 전달 행위는 양식과 자격을 갖추고 책임성이 큰 전문가의 몫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트럼프와 그의 팔로어에게 그게 과연 씨나 먹힐 수 있는 주장일까. 트럼프가 그러기로 한 순간 그는 이미 정보의 매개체로서 전통 언론을 배제한 것이다. 그 자리를 트위터가 채운 거다.
그 점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맥루한의 50년 전 통찰은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진정한 언론이라면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과 점차 커지는 그들의 영향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가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해독하는 일을 해야 한다. 정보원과 독자 사이에 인간이 중심이 된 매체가 더 이상 초청받지 못하는 사회가 돼간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게 핵심 질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반성문이다. 그 질문을 던지는 데 게을렀고, 그 답을 찾는 데 나태했다. 기자가 ‘기레기’로 불리는 까닭이 거기 있고, 큰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은 어디인가. 매체별로 처한 상황이 다른 만큼 결국 찾아야 할 길도 각기 다를 거다. 다만 그 길이 무엇이든 ‘언론(言論)’이라 하면 누구나 다시 새겨봐야 할 금과옥조가 분명히 있다.
춘추필법(春秋筆法). 그건 그저 ‘공자님 말씀’이 아니다. 정보원과 독자가 정보 소통에서 언론을 배제하려 하는 시대에 굳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간섭해야만 한다면 충분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그 답의 최대 근사치가 춘추필법이다. 2500년 동안 공자의 ‘춘추(春秋)’가 오경(五經)의 하나로 받들어진 데는 까닭이 있다. 춘추필법의 높은 가치야말로 미디어 트렌드를 초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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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치란 무엇인가. “대의명분을 좇아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그 뜻이야 누구나 알 거다. 문제는 철학과 노력과 자세다. ‘대의명분’ ‘사실’ ‘준엄’ 이 세 키워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치열한 취재 그리고 진중한 태도다. 그 점에서 정보 발주자와 진정어린 토론이 가능하고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어야만, 정보 발주자와 독자는 언론의 불편한 간섭을 감수할 것이다.
그 길은 언제나 앙상하고 고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