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소 불공정 하도급 확 바꿔라

[새 정부, 이것만은 바꾸자④]

디지털경제입력 :2017/05/25 09:08    수정: 2017/05/31 14:29

정현정 기자

근로자의 날인 지난 1일 한 조선소에서 타워크레인이 전도돼 총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났다. 피해를 입은 근로자 전원이 사내외 협력업체 직원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조선업 등 제조업 전반의 기형적인 고용구조 문제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달 한 게임사는 개발 자회사 직원들에게 신작 게임 개발을 완료하는 11월 말까지 크런치(crunch) 모드로 전환할 것을 지시했다가 비판 여론에 부딪혀 백지화했다. 단단한 것이 으스러질 때 나는 소리를 일컫는 크런치는 신규 게임 출시 전에 강도 높은 야근과 특근을 말하는 은어다.

올해 초에는 한 전자회사에 스마트폰용 금속 케이스를 공급했던 2차 협력사들이 1차 협력사의 파산으로 250억원 상당의 채권을 회수하지 못해 도산 위기에 몰렸다며 대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 회사는 1차 협력사에 약 1천200억원 상당의 발주액 대부분을 현금으로 지불했지만 2차 하청업체들은 6개월 만기 어음으로 받았다. 어음 만기가 도래하기 시작하자 1차 협력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2차 하청업체들의 채권 회수가 힘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1차 협력사가 하도급대금을 미지급하더라도 법적으로는 보호막이 없는 상태다.

납품단가 낮추기(일명 단가 후려치기), 중소기업 우수인력 빼가기, 연구개발 성과 가로채기, 하청업체 임금 꺾기, 위험의 외주화 등은 대기업 중심의 원청사업자들과 이들의 협력업체인 중소기업 관계에서 불공정 관행으로 지적돼 온 문제들이다.

일각에서는 대기업들이 근로자들을 손쉽게 해고하거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협력업체에 전가하기 위해 이런 기형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기형적인 고용 구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는 비단 IT 업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IT 산업 종사자들의 처우 개선과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IT 산업 기반 강화를 위해서는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하도급 관행 개선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업들이 위험성이 높은 업무를 도급으로 떼어내 협력업체에 하청으로 맡기는 관행을 말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막아야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사진=지디넷)

■위험한 일은 일은 하청업체가…‘위험의 외주화’ 만연

'위험의 외주화'는 기업들이 위험성이 높은 업무를 도급으로 떼어내 협력업체에 하청으로 맡기는 관행을 말한다. 화학물질이나 가스 등 위험 물질을 운반, 관리하거나 유지, 보수하는 일을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맡는다거나 가전제품이나 케이블·통신설비 수리를 맡는 외주업체 기사들이 제품을 점검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고용노동부의 산재 노동자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노동자 1만명 당 산재로 숨진 노동자의 숫자는 사내하청이 0.39명 인데 반해, 원청은 0.05명으로 하청업체의 사고 사망률이 원청의 8배에 달했다.

협력업체들은 위험한 작업을 하다가 문제가 생겨도 원청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상시적인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보니 안전규정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또 원청과 하청 간의 갑을관계로 인한 무리한 작업지시와 높은 노동 강도, 부족한 임금 등도 문제로 지적된다.

‘외주화’ 자체는 거스를 수 없는 트렌드다. 대표적으로 청소, 구내식당, 경비 같은 업무는 전문용역업체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고 공정 일부를 하청 업체에 맡기기도 한다. 원청 업체는 여러 협력사들이 만든 부품을 공급받아 조립해 판매하는 식이다. 이후 사후서비스(AS)도 하청업체에 맡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들은 외주화를 통해 조직을 슬림화하면서 비용을 절감하고 고용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안전 영역에 있어서는 원청과 하청을 구별하지 말고 원청 업체가 안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상시지속 업무의 경우 직접 고용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다단계 하도급과 위험의 외주화 금지 논의가 불붙고 하도급 금지 작업의 범위를 확대하는 입법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상시적인 유해위험 직업의 사내 하도급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는 조선소 크레인 충돌사고가 발생한 경남 거제를 직접 찾아 희생자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만나 산업현장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을 제정해 원청 사업주에게도 산업안전의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안전 영역에 있어서는 원청과 하청을 구별하지 말고 원청 업체가 안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진=지디넷)

■대·중소기업 ‘甲과 乙’ 구조도 여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행 문제도 근본적으로 원청과 하청 식의 갑을관계 구조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가 개최한 시흥지역 전기전자 제조업종 중소 하도급 업체 9개사 대표사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하도급 업체들은 "대기업과의 하청구조에서 1~2% 가량의 최소한의 영업이익 만을 보장 받고 있는 현실에서 기술 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면서 "아직도 대기업이 중소기업이 애써 개발한 기술에 대해 공동특허를 요구하는 등의 기술 유용 행위가 상존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공정위가 간담회에 앞서 전자업종에 대한 서면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법위반 협의가 2개 이상인 기업이 전체 58%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달부터 전자업종을 대상으로 하도급 분야에서의 부당대금결정감액, 부당발주취소, 부당반품, 기술유용 등 고질적인 4대 불공정행위를 점검하기 위한 직권조사를 실시하기로 한 것도 비슷한 배경에서다.

한 대기업 협력사 관계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부터 부품 공급 제안을 받았지만 이른바 '단가 후려치기'가 너무 심해 결국 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비유를 하자면 공급 대가로 만원을 제시했는데 이를 50원 수준으로 낮춰달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동차 부품 공급사 관계자는 “대기업에서 매년 로드맵을 정해놓고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한다”면서 “일단 요구를 맞춰줄 수밖에 없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대기업 협력사들이 하청업체에 2차 도급을 맡기면서 대금을 일방적으로 인하해 공정위로부터 제재조치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원청 업체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기업들이 감소하는 영업이익을 하도급 업체에 전가하고 이 여파가 2·3차 하도급 업체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IT 개발자들의 과도한 노동과 처우 개선 차원에서도 불공정 하도급 개선은 중요한 과제된다. 관행적으로 남아있는 다단계 하도급, 하청 근로자의 근로자의 열악한 근로조건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사진=지디넷)

■IT 종사자 처우 개선하려면?

IT 개발자들의 과도한 노동과 처우 개선 차원에서도 불공정 하도급 개선은 중요한 과제된다. 관행적으로 남아있는 다단계 하도급, 하청 근로자의 열악한 근로조건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특히 IT 업계에서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만연한 이유는 대부분 기업들이 IT 서비스 개발과 유지·보수에 드는 자원을 ‘비용’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IT 서비스 업무는 계열사로 분리돼있거나 외부 SI 업체에 외주로 맡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SI 업체는 개발을 다시 하청 업체에 넘긴다. 이러다보니 IT 서비스업은 대형 IT 업체와 협력업체로 양극화되어있고 협력업체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구성돼있다.

최근 크런치 모드 논란이 불거진 게임 업계가 대표적이다. 게임 개발이 실패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유통은 대형 게임사가 맡고 개발은 자회사나 중소 개발 전문 업체에 맡기는 하도급 구조가 일반적이다. 하도급 업체들은 인건비를 줄이고 출시 일정을 맞추기 위해 크런치 모드를 시행하며 IT 개발자들을 혹사시키게 된다. 최근 시장 경쟁이 심화되면서 단가 인하 압박이 증가한데다가, 모바일 게임이 중심이 되면서 게임 개발기간이 단축되고 실시간 유지보수는 증가하면서 장시간 근로도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단계 하청 구조를 거칠수록 개발 일정은 빠듯해지고 수주 단가는 내려가고 근로조건은 열악해진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월 발표한 IT 업종 사업장 89개소 대상 서면 실태조사에 따르면 1차 협력업체 임금은 대부분 원청 근로자 대비 50~60%에 불과했다. 복리후생은 도급 단가 등에 포함시켜 거의 없거나 미미한 수준이다. 한 업체의 경우 대기업인 원도급의 근로자가 임금과 복리후생으로 월 467만원 가량을 받는데 반해 협력업체 근로자는 43.8% 수준인 205만원을 받는데 그쳤다.

IT 업계 종사자들은 IT 개발자들이 부품으로 취급받는 현실 속에서 우리나라 IT 산업 기반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는다. 하도급 구조를 줄이고 불공정한 하도급 사례나 불공정 관행 시정 등 IT 기업에 대한 감시도 강화해야한다는 지적이다.

한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아무리 소프트웨어 기업 R&D를 지원해도 납품할 때 단가가 깎이고 착취 당하는 구조에서는 공정거래 인프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서 ”공공 및 대기업이 SW 기업에 제값 주지 않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거래 관행에 대해서는 공정위가 일벌백계하고 기술 침해, 인력 빼돌리기를 금지하는 동시에 했을 때는 징벌적 배상을 하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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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중소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제품개발이나 R&D를 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을 만들어 대기업 의존도를 줄여 수평적 기업구조를 만드는 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선 기간 중 더불어민주당에서 새로운대한민국위원회 4차산업분과 공동위원장 겸 일자리위원회 본부장을 맡았던 유웅환 박사는 “경쟁력 있고 기술로 선도하는 중소기업이 나오면 원청과 하청의 개념도 깨질 것 같다”면서 “정부 정책이 기술 기업 위주로 가서 기존 중소기업들이 기술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