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세가 화제다. 때마침 빌 게이츠와 유럽의회가 상반된 입장을 보인 때문이다. 나도 그 주제로 칼럼을 하나 썼다. (☞'로봇세 공방'이 제기한 두 가지 질문)
쓰고 보니 조금 허전했다. ‘왜’란 질문이 빠졌기 때문이다. 물론 빌 게이츠가 로봇세를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는 소개했다. 하지만 유럽의회가 왜 로봇세를 채택하지 않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원본을 직접 읽어보기로 했다. 룩셈부르크 출신인 매디 델보가 지난 해 5월말 제출한 ‘보고서’(Draft Report)였다. 이 보고서는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에 로봇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하고 있다.
보고서는 총 22쪽 분량이었다. 매디 델보는 왜 이 보고서를 작성한 걸까? (☞ 매디 델보 보고서 바로가기)
그는 보고서 앞부분에서 “기업들에게 예측 가능하고 명확한 조건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사용이 늘고 있는 만큼 안정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토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 국가들에 로봇 관련 규제 주도권을 내줘선 안 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도 함께 작용했다.
■ 로봇 법적 지위부터 보상체계까지 폭 넓게 다뤄
이런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로봇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보자. 로봇이 제3자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누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까? 똑똑해진 로봇이 계약을 체결했을 땐 어떻게 될까? 계약 불이행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간단한 것 같지만, 일반화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유럽의회가 공식 채택한 델보 보고서는 계약 상황과 비계약 상황으로 나눠서 로봇의 배상 책임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진짜 심각한 것은 로봇이 실제로 인명피해를 입히는 경우다. 자율주행자동차가 상용화될 경우엔 당장 처리해야 할 현안 문제다.
물론 기존 법률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로봇의 ‘지능’ 정도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만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로봇의 학습 능력과 자율성에 따라 책임의 범위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하고 있다. 교육 수준이나 자기학습 능력이 높은 로봇일수록 더 많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얘기다.
이 권고안에는 또 가장 진화된 자율 로봇에겐 ‘특수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전자인간’(electronic persons with specific rights and obligations)이란 법적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유럽의회가 지난 1월 승인했다.
보험 얘기도 흥미롭다. 델보는 로봇으로 인한 상해 피해 등을 보상하기 위해 ‘의무보험’(compulsory insurance)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로봇 도입 이후 예상되는 여러 피해에 활용하기 위한 보상기금(compensation fund)을 구축하자는 제안도 있다. 로봇 상해로 인한 피해를 의무보험으로 감당하기 힘들 때 이 기금을 활용하게 된다.
똑똑한 모든 자율로봇에 대해 ‘일반 기금’(general fund)을 구축하자는 부분도 있다. 물론 기금은 로봇 제작기업이나 활용 기업들이 출연하게 된다.
■ 우파 반대로 로봇세 채택 못해…법적 지위 등 로봇 논의 토대 큰 의미
로봇세 얘기는 권고안 10쪽에 나온다. 권고안에는 ‘로봇세’란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고 있다. 대신 세금과 보안 문제에 기업들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이를 위해 델보는 2020년이 되면 유럽에선 ICT 전문가 82만5천명이 부족하게 될 것이란 EC 전망 수치에 주목한다. 이와 함께 일자리의 90% 가량은 최소한 기본 수준의 디지털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인 만큼 EC와 각국 정부는 일자리의 변동 추이에 면밀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권고했다. 로봇과 AI과 본격 도입될 경우 고용 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세금 문제와 함께 기본 소득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게 이번 권고안에 나오는 로봇세 관련 부분의 핵심 논리다.
하지만 이 부분은 유럽의회에서 채택되지는 않았다.
이번 보고서를 기초한 매디 델보는 유럽의회 공식 사이트와 인터뷰에서 “자유당(ALDE), 유럽국민당(EPP, 보수개혁연합(ECR) 등 우파들이 (로봇이) 인력시장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고려하길 거부한 데 실망을 금치 못하겠다”고 밝혔다.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로봇세는 북유럽 국가들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기본 소득만으론 부족한 재원을 로봇세 징수를 통해 보충하자는 논리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로봇세는 유럽 의회에서 채택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회가 로봇세 도입에 반대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여전히 불씨가 살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로봇에게 ‘특수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전자인간’이란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데 동의한 만큼 여전히 진행 중인 이슈나 다름 없다.
물론 로봇세 도입에 반대 의견을 보이는 쪽도 적지 않다. 로봇이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생각만큼 상관관계는 크지 않다는 것이 기본 논리다. 블룸버그는 ‘로봇세는 나쁜 아이디어다’는 기사를 통해 이런 논리를 펼치고 있다. (☞ 블룸버그 기사 바로가기)
세금을 징수할 로봇의 범위를 정하는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델보 보고서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로봇 역시 지능 수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로봇세를 부과할 경우 혁신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국제로봇연맹(IFR)을 비롯한 관련업체들이 주로 주장하는 논리다.
■ 로봇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고민
유럽의회가 델보 보고서를 공식 채택하면서 로봇세가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번 보고서의 무게중심은 로봇세에 가 있는 건 아니다.
점점 똑똑해지는 로봇을 어디까지 인간의 영역에 담아낼 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이제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유사 인간’의 영역에 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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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갈 길은 멀다. 이제 로봇에 대한 기본 규제 틀과 윤리적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확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권고안은 강제 조항도 아니다. 따라서 이제 막 스타트라인에 섰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회가 이번 권고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킨 부분은 큰 의미를 갖는다. 로봇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틀이 마련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