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했던 일이 또 일어났다. 도널드 트럼프가 여론 조사 결과를 뒤집고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럼프 당선 과정은 지난 6월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브렉시트 투표’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잠시 시간을 5개월 전으로 되돌려보자. 지난 6월 영국 유권자들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다수 여론 조사 기관들도 기각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선거 직전까지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선 힐러리 클린턴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터 저널리즘 전문 사이트 파이브서티에잇(FiveThirtyEight)은 클린턴 승리 확률이 71%라고 전망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다른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클린턴 승리를 점친 근거는 명확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경합 주(swing states) 중 최소 5, 6개 지역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플로리다, 오하이오, 네바다, 아이오와, 노스캐롤라이나가 대표적인 경합주다. 트럼프는 이 경합주들에서 모두 승리했다. 4년 전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후보였던 밋 롬니는 5개 주 중 노스캐롤라이나만 가져갔다. 그만큼 트럼프 파워는 막강했다.
파이브서티에잇은 두 차례 미국 의회 선거 결과를 정확하게 적중시킨 네이트 실버가 주도하는 사이트다. 이 사이트는 지난 번 대선 때도 다른 조사 기관들이 박빙 승부를 예상할 때 오바마 압승을 예측해 주가를 높였다. 하지만 이번엔 ‘네이트 실버 마법’마저 통하지 않았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대통령이 닮은 건 그 뿐만이 아니다. 위대했던 과거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 점이나 ‘이민자 반대’ 같은 구호도 판박이처럼 똑 같았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를 반대했던 쪽의 운동 방식도 비슷했다.
지난 6월 투표 때 브렉시트 반대론자들은 “탈퇴안이 통과되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 점에선 ‘트럼프 반대론자’들도 비슷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은 재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 유권자들은 재앙을 택했다.
선거 구호도 비슷했다. ‘다 함께 더 강하게(Stronger Together)’를 외친 클린턴의 구호는 브렉시트 반대진영 슬로건인 ’더 강하게(Stronger In)’와 닮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트럼프 구호에선 ‘통제권을 가져오자(Take Back Control)’란 브렉시트 옹호자들을 연상케한다.
트럼프는 영리하게도 이런 심리를 잘 이용했다. 그는 자신을 ‘미스터 브렉시트’라고 불렀다. 선거 막판엔 “화요일(8일) 결과는 브렉시트의 10배쯤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브렉시트를 넘어(Beyond Brexit)’ ‘브렉시트 플러스(Brexit Plus)’ 같은 구호도 동원했다.
그리고 결과는 트럼프의 장담대로 됐다. 소외된 백인들과 제조업 붕괴로 인한 불만 고조 같은 정치, 경제적 요인들이 이변을 연출한 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심리에 불을 붙인 건 “이민자들 때문에 우리 삶이 더 빈궁해졌다. 그들을 막아야 한다”는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주류의 관점으로 보면 브렉시트나 트럼프 대통령 모두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음 깊이 품고 있었지만 감히 내뱉진 못했던 화두’를 거침 없이 던진 게 먹혀들었다는 공허한 결과론적 분석만 내놓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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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우리는 ‘브렉시트 후폭풍’을 놓고 열심히 주판알을 튕겼다. 이젠 ‘미국발 브렉시트’인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대한 분석 작업이 한동안 분주하게 계속될 것 같다.
게다가 우린 지금 사상 유례없는 ’최순실 수렁’에서 헤어나와야 하는 또 다른 과제까지 안고 있다. 올해 국내외 10대 뉴스 맨 위를 장식할 3대 이슈가 생각보다 무겁게 내 머리를 옥죄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