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스캔들’로 국정 마비상태다. 연일 터지는 뉴스 때문에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태평양 건너 미국도 만만치 않다. 대선을 코 앞에 두고 터진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로 워싱턴 정가가 떠들썩하다.
물론 클린턴 스캔들도 하루 아침에 터진 건 아니다. 연원을 따지면 지난 해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뉴욕타임스가 클린턴이 국무장관 재직 시절인 2010~2012년 사이에 사설 이메일을 사용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시작됐다. 집 지하실에 서버를 두고 clintonemail.com이란 별도 계정을 만들어 썼다는 얘기였다.
올 여름까지 떠들썩했던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은 지난 7월 일단락되는 듯 했다. 연방수사국(FBI)이 “불법 행위를 저지른 증거가 없다”면서 무혐의 처리한 것. 당시 공화당 트럼프 후보 진영은 FBI를 맹비난했다. 최대 호재가 될 수도 있는 사안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 FBI, 섹스팅 수사하다가 초강력 폭탄 터뜨려
그런데 선거 막판 돌발 변수가 생겼다.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이 지난 28일(현지 시각) 클린턴 이메일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발표한 것. 다른 건 수사를 위해 압수한 PC에서 클린턴 이메일을 다량 발견했다는 게 FBI 발표 골자다.
백악관 입성이 당연시됐던 클린턴 측은 막판 악재에 강력 반발했다. 여기저기서 FBI가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트럼프 측은 “즉각 조사해야 한다”고 FBI를 강하게 압박했다.
‘최순실 스캔들’이 처음 보도됐을 때 외신들이 ‘한국판 클린턴 이메일 사건’이라 칭한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국가 기밀 문건이 다른 경로로 외부로 유출됐을 개연성이 비슷하단 의미였다.
그런데 FBI가 이번에 ‘추가 이메일 발견’ 사실을 공개하면서 얘기가 살짝 더 흥미 위주로 흘렀다. 힐러리 클린턴의 20년 비서인 후마 아베딘이 연루된 때문이다.
배경은 이렇다. 후마 아베딘의 남편은 앤서니 위너 전 하원 의원이다. FBI는 위너 전 의원이 미성년자와 음란 문자를 주고 받은 정황을 수사하고 있었다. 이 수사를 위해 위너 전 의원 PC를 압수했는데, 그 곳에서 클린턴 이메일을 발견한 것이다. 위너 PC를 아베딘이 함께 사용한 흔적이란 게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이다.
위너는 2011년 여대생에게 자신의 음란 부위를 찍은 사진을 전송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의원직이 박탈됐던 인물이다. 그런데 또 다시 미성년자와 ‘섹스팅’을 했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이런 저런 추문이 겹치면서 아베딘과 위너는 이혼을 했다.
클린턴은 이런 여러 추문에도 아베딘을 끝까지 내치지 않았다. 그만큼 깊이 신임했단 얘기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뇌관'이 터져버렸다.
■ 뉴스 메이커로 떠오른 클린턴 20년 그림자
후마 아베딘은 조지 워싱턴대학 재학 중이던 1996년 인턴으로 백악관에 들어갔다. 당시 영부인이던 힐러리 클린턴 비서로 발탁된 것이 20년 인연의 출발점이 됐다. 2000년 상원의원 선거와 2008년 대통령 선거 출마 때도 힐러리 클린턴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후마 아베딘은 탁월한 능력 못지 않게 출신 성분 때문에도 꽤 화제가 됐다. 미국 사회 주류인 WASP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베딘은 사우디아라비아 태생이다. 어머니가 그 곳에서 교수 생활을 할 때 탄생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사우디아라비아인은 아니다. 어머니는 파키스탄계이며, 아버지는 인도계다. 어쨌든 무슬림 출신인 셈이다.
또 다시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이 터지면서 ‘최순실 태블릿’과 비교되는 건 이런 정황 때문이다. 실제로 겉모양만 놓고 보면 꽤 비슷한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공적인 메일이나 자료가 사적인 경로로 유출된 점이 가장 닮았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좀 많이 다르다. 힐러리 클린턴 이메일 조사 사실을 공표한 제임스 코미 FBI 국장 임명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렇다고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견제를 하는 사이도 아니다.
일단 미국은 시스템적으로 ‘노골적인 정치 참여’가 살짝 불가능하다. 우리와 달리 해치법(The Hatch Act)이란 게 있다. FBI 같은 정부 기관이 정치에 개입할 경우 해치법 위반으로 바로 처벌받게 돼 있다. 실제로 이번 주 들어 미국 외신들은 제임스 코미 국장이 해치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계속 내놓고 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제임스 코미는 왜 선거를 열흘 남짓 앞두고 엄청난 핵폭탄을 터뜨렸을까?
난 요즘 tvN 금토 드라마 ‘K2’를 즐겨 본다. 그 드라마를 보면 검찰총장이 정계 풍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거취에 신경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보험을 들어놓는다”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코미가 양쪽에 다 보험을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정세를 놓고 보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미국 대선은 사실상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 코미는 왜 해치법 기소 위험을 무릅쓰고 ‘폭탄’을 터뜨렸을까?
■ 미국 언론들, 수색 영장 적용 범위 놓고도 공방
궁금증이 끊이지 않던 차에 흥미로운 글을 하나 발견했다. ‘2016 미국 대선 업데이트’란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 2016 미국 대선 업데이트 바로가기. 이 글 상당부분은 ‘2016 미국 대선 업데이트’와 운영자인 박상현 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도 함께 밝힌다.)
"힐러리 기소 포기로 공화당원들과 트럼프로부터 FBI가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는 비난을 받은 코미는 또 다시 힐러리에게 유리한 결정으로 비칠 행동을 함으로써 FBI의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을 받느니 이번에는 힐러리에게 불이익으로 보이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FBI의 스탠스를 중화(neutralize)하겠다는 의도다."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이 우리 사회와 다른 점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고려(와 고민)’이 꽤 많이 앞서고 있다면, 저들은 (박상현 님 표현대로라면) ‘정치 사건을 다루는 수사기관의 고민’에서 출발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미국 정치 전문 사이트 폴리티코를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또 하나 발견했다. ‘수색 영장’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 폴리티코 기사 바로가기)
대충 이런 내용이다. FBI는 앤서니 위너 전 의원의 ‘섹스팅’을 수사하기 위해 영장을 받았다. 무슨 얘기인가? 그 영장 갖고선 위너의 PC에서 클린턴 이메일을 수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포괄적인 수색은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디지털 자료도 마찬가지다. 수사기관이 특정 범죄에 대한 수사 목적으로 영장을 받았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만 수색을 해야 한다.
물론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당사자인 후마 아베딘이 ‘클린턴 이메일 수사’ 건에 동의하는 경우다. 그럴 경우엔 별도 영장을 받을 의무가 사라진다.
그런데 폴리티코에 따르면 아베딘은 FBI에 그런 동의를 한 사실이 없다. 아베딘 본인 조차도 제임스 코미 FBI국장이 공식 발표를 한 이후에야 사안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 겉보기와 달리 꽤 많이 다른 두 사건
유사한 모양새와 달리 두 사건의 속내를 들려다보면 꽤 다르다.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을 ‘미국판 최순실 사건’이라고 부르거나, ‘최순실 스캔들’을 ‘한국판 클린턴 스캔들’이란 부르는 건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보면 그렇다.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클린턴 이메일 사건’은 ‘부주의가 빚은 참사’였다. 힐러리 클린턴이 사설 메일 계정을 만들어 쓴 건 업무용과 개인용 휴대폰을 따로 갖고 다니는 게 번거로운 게 가장 컸다.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 역시 정치적 이해타산과는 거리가 조금 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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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놓고 '디지털 인권'이 또 다시 이슈가 되는 점도 신선했다. 당연히 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상식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나도 몰랐다. 남의 나라 스캔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갖게 될 줄은. 누군가 “그것 또한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더라도 딱히 반박할 구실이 떠오르진 않는다. 그럼에도 참 많이 부럽다. ‘같은 듯 다른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심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