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이 가상현실(VR) 분야를 겨냥한 차세대 플랫폼 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 '프로젝트 얼로이(Alloy)'란 이름으로 개발해 온 무선 VR헤드셋을 지난 8월 미국 연례 개발자컨퍼런스(IDF)에서 시연했다. 이걸로 VR 기술의 주 소비처를 기존 산업, 국방, 교육 분야에서 소비자 기기와 콘텐츠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키울 기세다.
내로라하는 IT거인들이 앞다퉈 뛰어든 VR 플랫폼 영역에서 인텔의 야심은 어떻게 구체화할까. 인텔이 강조하는 관련 기술과 업계 분위기를 통해 이를 짐작해 봤다.
■플랫폼 투자-인수와 개발자 영입 시도
앞서 인텔은 구글글래스와 비슷한 고글형 기기를 만들던 '레콘인스트루먼츠'를 사들였고, IDF에서 VR헤드셋을 내놓은 뒤인 9월초엔 리얼센스 카메라 기술 발전을 꾀한다는 명분을 걸고 '모비디우스'를 인수했다. 인텔은 모비디우스 인수를 통해 영상처리 분야에 딥러닝, 맵핑, 충돌방지, 사물인식 등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런데 머리에 쓰는 웨어러블 기기 또는 VR분야에 투자한 다국적 IT기업이 인텔밖에 없는 건 아니었다. 이 흐름에 '매직리프'에 투자한 구글, '오큘러스VR'을 인수한 페이스북, '메타이오'를 인수한 애플,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포브(FOVE)'에 투자한 삼성이 동참했다.
이들 사이에서, 인텔은 뭘 하려는 걸까? IDF에서 VR헤드셋의 제품명이나 구체적인 제원, 판매 계획 등을 부각시키지 않았던 점을 염두에 두면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기기를 팔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그보단 '인텔표 VR 플랫폼'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고 봄직하다.
정황 증거는 쉽게 발견된다. 인텔은 그간 소프트웨어 개발자 커뮤니티에 제공했던 기판형 컴퓨터와 개발킷(SDK)을 리얼센스 카메라 및 로봇 기술 응용 도구로 확장한 '리얼센스 로보틱 개발킷'과, AR 및 VR 카메라용 개발킷으로 만든 '리얼센스ZR300 개발킷'을 선보였다.
인텔에게 VR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확보는 시작일 뿐이다. 이런 개발자들이 만든 앱을 실제로 쓸만한 제품으로 만들어 줄 하드웨어 제조사 파트너 확보가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다.
실제로 인텔 측은 프로젝트 얼로이를 공개한 취지에 대해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리얼센스 센서를 이용해 VR의 핵심 기술을 표준화하고 여러 하드웨어 기업들이 이 기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여러 VR기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 "VR은 하드웨어 기본규격뿐 아니라 운영체제, 서비스, 콘텐츠 등이 얽힌 복합 환경인데 현존 VR헤드셋 관련 기술의 구성요소는 제각각"이라며 "인텔은 소비자가 어떤 제조사와 디자인을 채택한 제품을 선택하더라도 같은 환경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규격을 표준화하고, 어떤 제조사든 이 규격에 맞춰 자유롭게 제품을 만들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프로젝트 얼로이를 통해 범용성과 시장 경쟁력을 갖춘 VR 컴퓨팅 표준 환경을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하드웨어 제조사들에게 제안했다는 얘기다.
■ 독립형 단말-융합현실 지향
인텔이 내건 차별화 요소는 뭘까.
프로젝트 얼로이는 인텔 프로세서와 심도 센서 기술을 녹인 독립형 VR헤드셋이다. 착용자의 두 눈에 각각의 화면을 표시해 입체감을 느끼게 한단 점에서는 기존 VR헤드셋과 비슷하다. 다만 인텔 측은 PC같은 시스템과 유선 연결된 VR헤드셋보다, 착용자에게 다양한 행동반경을 보장한다고 자부한다.
인텔이 이런 자신감의 근거로 제시하는 논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외부 시스템에 종속된 장치의 경우 현재 네트워크 및 컴퓨팅 기술 수준으로는 정상작동을 위해 일정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실감나는 그래픽과 반응 속도를 구현하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프로젝트 얼로이는 이런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자체 CPU, 메모리, 저장장치, 무선네트워킹 기능을 갖춘 컴퓨터에 인텔의 적외선 프로젝터 및 센서가 포함된 '리얼센스3D' 카메라를 결합한 장치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인텔은 프로젝트 얼로이가 VR을 넘어 증강현실(AR), 또는 융합현실(MR)이라 불리는 디지털 경험 시나리오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는 점을 또다른 경쟁력으로 강조하고 있다.
과거 VR 기기와 콘텐츠의 개념은 사용자를 컴퓨터로 구현된 가상의 공간에 데려다 놓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하는 것에 쏠려 있었다. 그에 비해 AR은 현실 공간에 가상의 요소를 덧입힌 것으로 묘사된다. VR은 가상 세계의 몰입감, AR은 현실 속의 연결성을 체험하기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MR은 둘의 장점을 타협 없이 모두 극대화할 수 있는 디지털 경험 시나리오를 가리키기 위해 대두된 용어다. 가상 세계의 몰입감을 온전히 누리면서 다른 사람과의 연결, 물리적 현실과의 상호작용까지 놓치지 않게 해 준다면 MR이라 불릴 만하다. 인텔의 지향점이다.
■ MS와의 협력 강조…엔터테인먼트에 무게
인텔이 꿈꾸는 VR플랫폼 확산 시나리오에는 '포케몬 고' 등 게임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중요하게 언급됐다. 앞서 '홀로렌즈'라는 MR 기기와 이를 위한 윈도10 기반 앱 개발 환경 '윈도 홀로그래픽'을 소개한 마이크로소프트(MS)와의 협력이 비중있게 부각됐다. 하드웨어 제조사들에게 진입장벽을 낮춰 주는 역할을 하겠다는 자신감도 드러났다. 이를 담은 인텔 측 관계자의 설명을 발췌했다.
"프로젝트 얼로이는 VR이 중심에 있지만 리얼센스 카메라가 포함돼 AR도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중략)… 현재 개발자 버전이 공개된 MS 홀로렌즈도 MR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 VR 기기들은 어떤 형태로든 2가지 기술을 복합적으로 이용하게 될 것이다. MR이 중요한 이유는 콘텐츠 영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중략)… 인텔은 MS와 손잡았다. MS는 2017년부터 '윈도 홀로그래픽' 플랫폼이란 이름으로 윈도10용 VR 관련 기술을 표준화할 계획이다. MS 홀로렌즈와 인텔 프로젝트 얼로이가 이 환경에 최적화된다. 콘텐츠 개발업체들은 이 플랫폼을 이용해 다양한 기기에서 게임, 영화, 산업용 콘텐츠까지 읽어들일 수 있다."
또 인텔은 국방, 의료, 교육 등 일부 업종에서 생산성과 정보전달에 초점을 맞춰 제한적으로 쓰여 온 VR플랫폼의 활용처를 일반 소비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역으로 크게 늘리겠다는 메시지를 제시했다. 이같은 비전을 실현할 수 있게 된 배경엔 인텔의 리얼센스 카메라 기술의 바탕이 되는 소형카메라 및 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기술 발전이 뒷받침됐단 설명도 덧붙였다.
"과거 가상현실, 증강현실 비즈니스의 주된 분야는 국방, 의료, 교육분야였다. 국방분야에서는 워게임 시뮬레이션, 무기개발, 전투기 조종 등에서 이러한 기술들이 활발하게 사용됐고 의료 분야에서는 의학실습을 목적으로 수술 등에 주로 사용됐다. …(중략)… MEMS 기술의 발전과 소형 카메라의 해상도 증가 및 기능 발전이 한몫 했다. MEMS 센서는 자동차, 스마트폰, 컴퓨팅, 비디오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된다. …(중략)… 90% 이상의 AR이 MEMS 센서 신호를 활용해 카메라 영상에 새로운 정보를 덧붙이는 형태다. …(중략)… 앞으로 소형 카메라 기술의 발달은 카메라모듈 수 증가, 3D 및 동작인식 기능 추가 쪽으로 갈 것이다. 이는 컴퓨팅 파워 증가로 이어져 VR 및 AR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
■ 고화질-반응성 프로세서 성능 자신감
인텔은 자사 VR플랫폼 비전 실현에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그 중 핵심으로 VR기기의 성능을 꼽았다. 실제로 VR을 접목한 게임은 원활한 작동을 위해 프로세서의 높은 연산 성능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이에 인텔은 자사 PC용 프로세서 상위 제품군인 '코어i7' 및 '코어i7 익스트림'이 현존 고성능 게임 동작에 유리할 뿐아니라 고화질 디스플레이 대응 콘텐츠를 처리하는데도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또 VR기기 착용자에게 어지러움을 억제하고 높은 몰입감을 제공하려면 양쪽 눈에 각각 4K 화질의 화면을 제공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을 인용하며, 4K UHD 표준 영상을 VR플랫폼 규격에 맞게 HEVC 10비트 코덱으로 실시간 디코딩하는 성능 면에서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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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의 메시지에 VR기기 제조사와 콘텐츠 공급업체들이 호응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일부 투자전문가들의 시장 관측은 긍정적이다.
일례로 영국 투자은행 디지캐피털은 지난해 4월 내놓은 세계 AR 및 VR 시장규모와 전망 자료에서 2020년 형성될 VR 영역만 놓고 본 시장 규모를 300억달러로 예상했다. 이 자료는 2016년 VR 및 AR 시장을 20억달러, 2018년 500억달러, 2020년 1천500억달러 규모로 추산 및 예측했는데, 전망 기간 초기는 VR 시장 규모가 더 크지만 2017년을 기점으로 AR 영역 매출이 커질 것으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