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저널리즘, 뉴스의 오래된 미래다

[김익현의 미디어읽기] 몰입에 대한 갈망 구현

데스크 칼럼입력 :2016/03/29 17:27    수정: 2016/03/30 09:1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2010년 어느날. 당신은 저녁 뉴스에 몰입하고 있다. 목성 최대 위성인 유로파에서 외계인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속보로 나오고 있다.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머리에 쓴 디스플레이를 통해 유로파 표면을 볼 수 있다. 3차원 전방위 비디오의 왼쪽을 보면서 ‘선택’이라고 외친다. 그러자 또 다른 창이 뜨고 유로파의 얼어붙은 수소 머디 마래서 생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보여주는 상세한 애니메이션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현상을 설명한 문구 같은가? 언뜻보면 요즘 유행하는 가상현실(VR)의 한 장면 같다. 물론 아니다. 인용한 글은 미국의 저명한 뉴미디어 학자인 존 파블릭(John Pavlik)이 2001년 출간한 ‘저널리즘과 뉴미디어(Journalism and New Media)’에서 묘사한 미래의 뉴스다.

저 글은 한 뛰어난 학자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쓴 글은 아니다. 현재 럿거스대학 교수인 존 파블릭은 콜롬비아대학 뉴미디어연구소 재직 당시 ‘모바일 저널리스트 워크스테이션(Mobile Journalist’s Workstation)’을 개발하면서 몰입 영상 구현에 힘을 쏟았던 인물이다.

1990년대말 미국 콜롬비아대학 뉴미디어연구소가 개발했던 모바일 저널리스트 워크스테이션. 몰입 저널리즘을 추구했던 저 도구는 VR 저널리즘의 선구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진=콜롬비아대학)

당시 그는 고화질 카메라와 동영상 기기, 휴대형 PDA 등 당시로선 최첨단 기기로 무장한 ’움직이는 1인 뉴스룸’을 꿈꿨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저널리스트에게 최첨단 기기로 무장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독자들을 콘텐츠에 몰입하도록 만들겠다는 게 진짜 목표였다.

■ 뉴욕타임스-CNN 등 주요 언론사 잇단 참여

요즘 VR 저널리즘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VR 저널리즘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구글 카드보드 100만개를 배포했다. CNN은 지난 해 삼성 기어VR을 통해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를 VR 영상으로 중계했다.

최근엔 VR 저널리즘을 본격적으로 다룬 보고서도 나왔다. 미국 나이트재단과 USA투데이 네트워크가 공동 발표한 ‘미래 보기저널리즘에서의 가상현실(Viewing the Future? Virtual Reality in Journalism)’란 보고서다. 지난 3월 중순에 발표된 이 보고서는 VR시장 전망과 함께 주요 언론사 관계자 인터뷰까지 담아내면서 VR 저널리즘의 속살을 파헤쳤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해 12개 언론사가 약 60건 정도 VR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VR 보도는 주로 360도 동영상 카메라나 움직이는 3D 모델을 활용해서 제작됐다. 이를 통해 가상현실 속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구현하고 있다.

CNN이 지난 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를 VR 기술을 활용해서 방송했다. (사진=CNN)

뉴욕타임스처럼 복잡한 장비를 동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360도 카메라를 활용해 다양한 영상을 촬영한 뒤 이어붙이는 방식도 많이 사용된다. 이렇게 제작한 영상은 앱을 통해 유통하거나 유튜브 360 같은 사이트에 올린다.

언론사들은 왜 VR을 활용한 보도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 언뜻보면 그냥 유행하는 기술에 편승하는 것 같다. VR이 뜨니까 VR 저널리즘이란 걸 선보이는 모양새다.

하지만 저널리즘 학자와 뉴미디어 전문가들의 연구추이를 살펴보면 조금 다른 그림이 보인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오랜 갈망에 다다를 수 있다.

앞에 소개한 파블릭 같은 학자들은 ‘몰입 저널리즘(immersive journalism)’을 구현하는 걸 중요한 목표로 삼고 연구를 진행해 왔다. 몰입 저널리즘이란 말이 생소한가? 쉽게 설명하자면, 독자들로 하여금 뉴스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그 속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옹골찬 꿈이다.

따라서 VR 저널리즘 역시 궁극적으론 ‘스토리텔링’이란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인간은 원래 '실감나는 이야기'를 갈망하는 동물

인간은 원래 이야기를 갈구하는 동물이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셰에라자드 신드롬’은 인간의 본능을 가장 잘 묘사한 우화다. 끝없이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갈구하는 동물. 그게 바로 인간이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다만 대중매체 시대엔 기술적 한계 때문에 '전해듣는 뉴스'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SNS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기자를 거치지 않고 뉴스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이게 예외적인 현상일까? 난 SNS 뉴스 소비가 인간의 ‘오래된 미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마을 공동체나 카페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뉴스를 주고 받는 게 인간의 본래 모습이었다. 대중 매체 시대에 불가능했던 그 풍속도가 SNS 덕분에 다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VR 열풍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사진. (사진=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페이지)

당연한 얘기지만 문자 뉴스 뿐 아니라 구어 뉴스의 경쟁 포인트 중 하나는 수용자를 몰입시키는 능력이다. 그래서 생생한 묘사에 신경을 쓰고, 때론 과장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VR 기술은 독자들을 직접 현장 속으로 안내하는 것을 지향한다. 대신 소식을 전해주는 대신 아예 직접 경험해보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VR과 저널리즘은 결코 생뚱맞은 조합은 아니다. 뉴스 속에 직접 개입하고픈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해결해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라고 해도 크게 그르진 않다.

그렇다면 VR은 저널리즘의 미래일까? 질문을 이렇게 던지게 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중요한 건 ‘VR 기술’이 아니라 ‘VR까지 동원한 생생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인가? 360도 카메라든, VR이든, 혹은 한 단계 더 나아간 증강현실(AR)이든 저널리즘 행위의 근본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뉴스를 갈망하는지, 그리고 어떤 뉴스를 갈망하는 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그 질문을 파고들면 ‘VR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VR을 잘 구현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고민’이란 뻔한 해답에 이르게 된다.

■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스토리텔링

최근의 VR 저널리즘 열풍도 그런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괜한 호들갑’이라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쟤들은 벌써 저렇게 앞서가는데”라면서 지나치게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는 얘기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우리보다 훨씬 깊은 미국 언론사들이 최근 들어 왜 VR에 눈길을 보내는지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애기이기도 하다.

나이트재단 보고서 저자들은 VR 저널리즘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장기 성장 전망에 의문부호가 없는 건 아니지만 2016년은 VR 저널리즘에 있어 중요한 한 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VR 저널리즘에 담겨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쉽게 외면하진 못할 것이란 게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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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솔직한 얘기로 글을 맺자. 난 지금의 VR 열풍이 어디까지 확대될 지 잘 모르겠다. VR 저널리즘 역시 1, 2년 내에 승부가 날 단기전은 아닌 것 같다는 얘기 외엔 크게 보탤 말이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VR 저널리즘은 기술이 아니라 ‘몰입 스토리텔링’이란 관점에서 바라볼 때 좀 더 분명한 지향점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문제는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